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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역사학자 이병도에 대한 단상

by kirang 2009. 6. 12.

  두계() 이병도.

  한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름을 들어 봤을 역사학자이다. 한국사학계의 대부라고까지 불리우는 이병도는 189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렸을 적부터 영민함 때문에 유명했다고 한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나와 일본으로 유학을 간 후 1919년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나라에서 근대 학제의 정규과정을 밟은 첫번째 역사학자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병도는 일제가 조직한 조선사편수회에 촉탁으로 참가하기도 하였고, 진단학회를 구성해 역사연구를 진행하였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문교부 장관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그는 노년까지 왕성한 학문적 활동을 하다 1989년에 타계하였다.

  일제시대 한국에서 유행하였던 역사학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신채호, 박은식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이고, 또 하나는 백남운 등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이며, 마지막이 이병도로 대표되는 실증주의 사학이다. 이중 앞의 두 사학은 강한 정치적 의지와 현실 참여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민족주의 사학은 민족주의 운동에,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사회주의 운동에 이론적 틀을 제공하며 일본 관변 사학자들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항했다. 당시 한국사를 연구하는 일본 학자 대다수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식민주의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봉사하는 이러한 역사연구를 흔히 식민주의 사학이라고 한다. 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반(反) 식민주의 사학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실증주의 사학은 비교적 친 체제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실증주의 사학의 모토는 '불편부당하며 주관성을 최대한 배제한 객관적 역사학'였는데, 때문에 철저한 아카데미즘을 추구했고 정치적인 문제와는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정치적 중립과 객관성을 내세우며 침묵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현 시스템에 대한 암묵적 동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실증주의 사학은 치밀하고 발전된 연구 방법론을 가지고 있음에도 당대에 이미 민족주의 사학이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로부터 식민주의 사학의 아류라는 비난을 받았고, 해방 이후에도 '실증주의 사학=식민주의 사학'이라는 비난을 받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실증주의 역사학자 이병도는 일본 제국주의 시스템에 전혀 저항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식민지 체제를 찬양하거나 식민주의 사학에 편승해 역사 연구를 수행한 것도 아니다. 이병도는 수십 년간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 강한 비난을 받아 왔지만, 그 비난의 근거는 그가 이완용과 같은 집안 사람이라든지 조선사 편수회에 들어가 일했다는 것 정도이지, 식민체제를 공개적으로 찬양하였다거나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등의 적극적 친일의 증거는 알려진 바 없다. 이병도는 심지어 그 흔한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민족주의 역사학을 외치던 최남선이 변절하여 적극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였던 것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병도는 언제나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회피하는 입장을 취해 왔고, 이는 모든 사관을 배제하고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천명한 그의 역사연구 태도와도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도의 연구 성과물에서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은연중 드러난다. 이병도가 일제시기에 행했던 연구 중 임나일본부 연구위만조선 연구는 그의 학문적 입장과 성향을 짐작케 해주는 좋은 예이다.

  그는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식민주의 사학자들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며,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군사적 지배 기구가 아닌 가야와 왜 간의 무역을 담당하는 경제기구였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또,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고조선의 왕인 위만이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한국사의 타율성을 주장하는 데 반하여, 사서에 기록된 위만의 머리 모양과 복식으로 보아 그는 원래 중국인이 아닌 고조선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불편부당한 역사 서술을 외쳤지만, 연구의 내용을 보면 당대의 주류였던 식민주의 사학의 논리에 대항하여 팔이 안으로 굽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적극적인 친일파였고 식민주의 역사학자였다면 굳이 당대 식민주의 사학자 대다수가 주장하였던 임나일본부나 위만의 성격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병도가 식민지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누군가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그를 '친일파'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이야기다. 그는 식민주의 사학자들을 타도해야 할 적이 아닌 학문적 경쟁의 대상으로 여겼다. 외국으로 망명해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신채호 등과 달리 체제에 순응하여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고생과는 거리가 먼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설령 그를 '친일적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더라도 '식민주의 사관을 가진 사학자'라고 딱지를 붙이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학문적 영역에 있어서 이병도는 식민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침략적인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식민주의 사학과는 분명 다른 위치에 있었다. 그는  현대 역사학에서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는 '과거의 객관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체제순응형 지식인, 혹은 침묵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이병도를 비판할 수는 있겠다. 불의에 항거하는 행동하는 지성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본인이 선택한 방법론의 원칙에 끝까지 충실하고자 했던 의지와 성실함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평가해 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단체의 친일파 명단 발표나 인터넷 상에서의 친일파 비판에서 '식민주의 사학자'라는 명목으로 이병도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