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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만년필 "펠리칸 M400"

by kirang 2015.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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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만년필하면 6각형의 하얀색 별(사실은 별이 아니라 만년설이지만)이 박혀 있는 몽블랑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만년필 브랜드 중에는 몽블랑 외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들이 다수 존재하며 펠리칸도 그중 하나이다. 

  펠리칸 만년필은 개성 있는 외관을 가지고 있어 한눈에 알아보기 쉽다. 캡탑 위에 펠리칸 그림이 그려져 있고, 포켓에 꽂는 클립은 새의 부리를 형상화하였다. 클립 끝부분이 둥글게 처리되어 포켓에 꽂을 때 걸리거나 긁혀서 옷에 상처가 날 일이 없다. 펠리칸 만년필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잉크 저장 방식이다. 컨버터가 아니라 배럴(펜의 몸통) 자체에 잉크를 주입하는 '피스톤 필러'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잉크 저장량이 많고 배럴의 줄무늬 사이로 잉크의 용량이 바로 확인되므로 잉크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에도 용이하다. 무게 또한 무척 가벼워 장기간 필기를 해도 부담이 없다.

  M400은 펠리칸의 대표 모델 중 하나이다. 펠리칸은 고급 라인을 '소버린'으로 구분하는데, M400은 그 '소버린' 라인의 시작 격이다. 기본 모델 색상은 검정색, 파란 줄무늬색, 빨간 줄무늬색, 녹색 줄무늬색이 있는데, 이중 녹색 줄무늬가 펠리칸 만년필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디자인이다. 그러므로 펠리칸 만년필을 써 볼 생각이라면 검은 색보다는 줄무늬 모델을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평범한 검은색 만년필이라면 다른 브랜드에도 얼마든지 있다.

  M400은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회사 만년필들에 비하면 길이가 짧은 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손 크기라면 사용에 불편함은 없다. 뚜껑을 펜 뒤에 꽂으면 전체 길이가 꽤 늘어나므로 더더욱 문제될 것이 없다. 유난히 손이 큰 사용자라면 상위 모델인 M600이나 M800을 고려할 수 있다. 단, 한 등급씩 올라갈 때마다 가격이 현기증날 정도로 상승한다는 건 각오해야 한다. 특히 M600의 경우는 크기 면에서 M400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크기 때문에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면 M800으로 바로 가는 게 낫다. M800은 크기도 크기이지만, 일부 부속에 황동을 사용하여 어느 정도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펠리칸 만년필로서의 무게감이기 때문에 다른 브랜드에 비하면 여전히 가벼운 편에 속한다.

  펠리칸 만년필의 또 한가지 특징은 펜촉이다. 대부분의 만년필 회사는 펜촉에 회사 특유의 문양을 새겨 넣어 구분을 하는데, 펠리칸 역시 마찬가지이다. M400의 경우 '소버린' 라인이기 때문에 투톤의 금촉을 장착하고 있다. 그런데 문양보다 중요한 것은 펜촉의 구조이다. 펠리칸 만년필은 피스톤필러 방식치고는 펜촉 교환이 매우 쉽다. 한 손으로 배럴을 쥐고 다른 손으로 펜촉을 잡아 돌리면 나사가 풀리며 쉽게 배럴과 분리된다. 즉, 펜촉이 손상되었다 하더라도 사용자 스스로 교환하는 게 용이하다. 컨버터 방식의 만년필은 애초에 펜촉과 배럴이 분리되어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비교 의미가 없지만, 몽블랑이나 오로라 같은 브랜드의 '피스톤 필러' 방식 만년필에 비하면 펠리칸 만년필의 간단한 펜촉 구조는 직관적이고, 단순하며, 실용적이라 할 수 있다. 단, 만년필의 경우 대개 펜촉의 가격이 펜 전체 가격의 40~50%를 차지하므로 애초에 펜촉이 망가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최선이다.

  종이와 닿는 펜촉의 끝부분을 '팁'이라고 하는데, 금촉이라 하더라도 팁 부분만큼은 강도가 높은 이리듐이라는 금속을 붙인다. 금은 무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만년필 회사들의 경우 팁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펠리칸은 위 아래로 길죽한 형태로 팁을 붙인다. 사람마다 필기 습관이 다르므로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장점으로 본다. 글씨를 쓸때 둥글게 붙은 팁보다는 위아래로 길죽한 형태의 팁이 개성 있는 글씨를 쓰기에 좋기 때문이다. 만년필 글씨가 볼펜이나 수성펜 글씨에 비해 갖는 장점은 필압에 따라 굵기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팁의 모양이 길죽하면 미묘한 각도 조절을 통해 글씨 굵기 조절이 더 쉬워진다.    

  이제 이 펜의 아쉬운 점을 살펴보자. 펠리칸 만년필의 단점은 배럴과 캡(뚜껑)의 결합 방식이 나선형이라는 점이다. 물론 나선형 결합 방식이야 다른 회사 제품에서도 많이 있고, 고급 라인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니만큼 그 자체가 단점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펠리칸 만년필의 경우는 배럴과 캡의 결합이 쉽게 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펜 파우치 안에서 결합이 풀렸다면야 큰 문제가 없겠지만, 와이셔츠 포켓에 꽂은 상태에 캡이 풀려버리면 잉크가 새어 나와 옷에 묻는다든지 하는 곤란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게 걱정되어 캡과 배럴을 너무 세게 결합했다가는 또 펜이 망가질 염려가 있다.

  무게가 가벼운만큼 펜의 내구도에 있어 불안한 느낌을 준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만년필의 낙하는 브랜드를 막론하고 모든 만년필 사용자에게 악몽같은 일이지만 다른 브랜드는 펜촉이 망가질까봐 걱정하는 차원이라면 펠리칸은 펜 자체가 박살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랄까. 물론 실제로 떨어뜨린 적이 없으니 펠리칸 만년필 배럴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가벼운 펠리칸 만년필을 다루다보면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더 든다는 것이다. 가벼움은 펠리칸 펜의 장점이기도 한 만큼 양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펠리칸은 같은 독일 브랜드임에도 몽블랑과 달리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브랜드이다. 몽블랑이 계약서 사인을 위한 펜의 이미지라면, 펠리칸은 학자나 문필가를 위한 펜의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펠리칸은 고시생들이 많이 쓰는 펜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펠리칸이 그저그런 저가 브랜드인 것은 결코 아니다. 펠리칸의 라인업은 입문자용 저가펜에서부터 고가의 수집용까지 대단히 넓으며, 몽블랑과 함께 한정판 펜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브랜드이다. 외관과 기능에 있어서 오랜 전통과 철학을 바탕으로 강한 개성과 존재감을 지키고 있는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만년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사용해볼 가치가 있는 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