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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하나와 앨리스"

by kirang 2015. 6. 2.

  2004년 개봉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이다.

  이와이 슌지는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러브레터"는 일본 대중 문화가 막 개방되었던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한 거의 최초의 일본 실사 영화이기도 하다. "러브레터"의 반향은 대단히 커서 당시 이와이 슌지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감독으로 군림하였다. 당시 나는 이와이 슌지 감독에 대한 한국 언론의 호들갑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하나와 앨리스" 관람을 통해 이와이 슌지의 감성이 단순한 거품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와 앨리스"는 "러브레터"만큼 관객들에게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건이라는 것은 있지만 드라마틱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며, "러브레터"가 지니고 있는 환타지적 요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자극적인 맛 없이 잔잔하면서도 느릿하게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한 소녀들의 있을 법한 이야기를 펼친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 소녀 중 하나가 저지른 잘못은 꽤 심각하다. 그는 거짓말과 기만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사랑을 성취하고자 하였는데, 귀여운 거짓말이라고 웃고 넘어가기에는 범죄에 가까운 행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고, 힘겹게 그것을 교정하며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숙해졌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자 사기극의 공범자인 앨리스는 하나가 저지른 사고에 휩쓸린 피해자에 가깝다. 어쩌다보니 절친한 친구가 짜 놓은 기만극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악의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엉뚱하면서도 천진난만한 행동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데, 이 점은 앨리스를 연기한 아오이 유우의 훌륭한 연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앨리스 역시 영화가 진행되며 성장을 경험한다. 친구를 위하는 마음과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의 감정 사이에서 힘들어 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 준다. 이는 앨리스가 순수하면서도 선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이는 즉흥적이고 어린 아이 같은 행동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 같은 어른스러운 구석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앨리스의 성장 환경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혼을 하기는 했지만 밝고 엉뚱한 면은 어머니에게서, 사려 깊은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의도치 않게 두 소녀와 삼각 관계에 빠지는 '마크'는 하나가 한 얼토당토 않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는 소년이다. 선량하기는 하지만 소심한 구석이 있다. 사실 그다지 매력적이라고는 보기 힘든 평범한 이미지인데, 이와이 슌지 영화에서 남자들은 대개 그런 구석이 있다. 여자 캐릭터와는 달리 남자들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만 기능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무채색 캐릭터이다. 이를 보면 이와이 슌지는 그 자신이 남자이면서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남자의 내면을 탐구하거나 묘사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앨리스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착각하고 있는 '마크'의 기억을 되살려 준겠다는 명목으로 데이트를 한다. 하지만 실제로 기억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앨리스 쪽이다. 마크는 이전에 앨리스를 본 적이 없지만, 앨리스는 마크를 본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앨리스는 데이트 도중 이러저러한 가짜 추억들을 꾸며내 '마크'에게 들려 주지만, 그 가짜 추억 만들기의 끝에 도달했을 때 첫사랑과 작별을 고하게 된다.

  "하나와 앨리스"는 여운이 길게 남는 좋은 영화이다. 한 편의 사기극이자 삼각관계라는 스캔들을 다루고 있지만, 관람하는 이의 마음에 깨끗한 감동을 준다. 특히 영화 막바지에 앨리스가 사진 작가와의 면접에서 보여 준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