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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동북아역사지도와 하버드 ‘고대 한국 프로젝트’ 지원 사업 좌절

by kirang 2017. 2. 20.


  2016628일 동북아역사재단은 연세대서강대 산학협력단이 제출한 715장의 동북아역사지도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불합격 판정을 내리고 폐기를 결정하였다. 8년간 45억여 원의 예산이 투입되고 60여 명의 역사학자가 참여한 거대한 사업이 좌초된 것이다. 불합격 판정의 근거는 지도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동북아역사지도를 폐기시킨 진짜 이유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남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업의 무산을 요구하는 외부 세력의 압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가 있다. 20143월 결성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설립 직후 동북아역사재단의 고대 한국 프로젝트(EKP : Early Korea Project)’ 지원을 문제 삼았다. ‘고대 한국 프로젝트는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진행하던 사업이었다. 한국의 고대사 연구 성과를 영문 책자로 집대성하여 해외 학자들에게 알리는 사업으로,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2014년 초 발간된 한국 고대사 속의 한사군(The Han Commanderies in Early Korean History)이라는 책이 문제가 되었다. 국민운동본부는 이 책의 내용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따르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세워진 한사군 중 낙랑군을 한반도 북부 평양 지역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민운동본부는 20144월 감사원에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한 감사를 청구하였고, 이에 압박을 느낀 동북아역사재단은 결국 사업의 지원을 중단해 버렸다. 해외 학계에서 한국사는 중국사와 일본사에 비하여 위상이 크게 낮으며 비주류인 분야이다. ‘고대 한국 프로젝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유의미한 노력으로, 매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업이었으나 이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2015년에는 동북아역사지도가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이유는 동일하였다. 동북아역사지도에 낙랑군이 평양에 그려졌다는 것이었다. 국민운동본부의 공격수 역할을 맡았던 것은 유명한 대중 역사 저술가인 이덕일이었다. 그의 유명세 덕분이었을까. 정치권도 국민운동본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동북아역사재단을 압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2015417일에 있었던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이하 동북아역사특위)의 회의 모습이다.

  동북아역사특위는 동북아역사지도의 연구 책임자인 임기환(서울교대 역사교육)과 이덕일을 함께 출석케 하여 문답을 진행하였다.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구분하지 않고 이덕일의 편에 서서 임기환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이어나갔다. 신문과 방송 등 각종 언론 역시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이덕일의 일방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 보도하였다. 동북아역사지도 제작팀의 해명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정치인들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저지르고 있는 커다란 잘못을 자신들이 개입하여 교정하였다고 하여야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언론들 역시 동북아역사재단이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낭비하며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는 식의 자극적인 기사를 내는 편이 독자와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두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국민운동본부의 돌격대장 역할을 하였던 이덕일은 이덕일대로 매스컴의 관심을 즐기고, 동북아역사지도를 소재로 한 대중서(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2015)를 출간하며 부가적인 수입을 얻었다. 여러 집단의 무지와 공명심, 악의와 무책임이 뒤엉킨 가운데 역사학계가 8년간 공을 들여 만든 역사지도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이처럼 동북아역사재단이 오랜 기간 추진하고 있던 두 개의 커다란 사업, 동북아역사지도 편찬과 하버드 대학 고대 한국 프로젝트지원 사업은 연이어 폐기되었다. 해당 사건은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역사관을 가진 특정 세력이 정치권을 등에 업고 학계의 정상적인 활동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학문적 테러이자, 한국 역사학의 커다란 퇴보라 할 수 있다. 국제 학계는 한국의 정치권과 여론이 보여준 이러한 폭력적 행태에 대하여 어처구니없어 하는 분위기이다. 국민운동본부와 이에 부화뇌동하였던 정치인들은 자기들 딴에 애국심으로 그랬다고 자부하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나라 망신이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