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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관산성 전투,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가른 싸움

by kirang 2017. 4. 17.


  관산성(管山城) 전투는 554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전투이다.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백제의 한강 유역을 탈취함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분명히 하였고,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삼국 통일의 단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전투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1. 백제의 한성 상실과 나라의 재건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은 475년(개로왕 21) 가을 9월 고구려의 3만 병력에 포위되었다. 1년 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군은 사방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을 하였고 바람을 이용해 성문에 불을 질렀다. 백제인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였지만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던 중 개로왕이 기병 수십 기와 함께 도주를 시도하다가 붙잡혀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끌려가 살해당하였다.

  개로왕의 아들, 혹은 동생으로 전하는 문주(文周)는 한성이 공격당하자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황급히 신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1만 명의 원군과 함께 돌아왔을 때 한성은 이미 파괴되었고 고구려군은 물러간 뒤였다. 문주는 폐허가 된 도성 위에서 비통한 마음으로 왕위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熊津)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군사적 측면이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웅진은 고구려와의 국경으로부터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북쪽을 흐르는 금강과 주위를 둘러싼 산지 때문에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웅진 시대의 백제는 한성 함락의 충격을 오래도록 떨쳐내지 못했다. 본거지를 잃고 쫓겨 내려온 왕에게 지방의 귀족 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는 권위와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왕을 경시하는 신하들이 있어도 이를 제어할 수 없었다. 결국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병관좌평 해구(解仇)에게 목숨을 잃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삼근왕(三斤王)은 나이 13세에 불과하였다. 국정을 농단하던 해구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씨(眞氏) 가문의 힘을 빌어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삼근왕 역시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근왕의 사인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이른 죽음 역시 의심스러운 면이 적지 않다. 삼근왕의 사후 왕위에 오른 동성왕(東城王) 은 23년간 왕위에 있으며 백제의 재건에 힘을 쏟았지만 신하인 백가(苩加)에게 살해당했다. 

  그 다음에 왕위에 오른 무령왕(武寧王)은 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제압하는 한편 견실한 내정으로 나라의 체질을 튼튼히 다졌다. 또한 중국의 남조 국가인 양(梁)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펼쳤는데, 그 양상은 중국식 무덤 양식을 채택한 무령왕릉과 그 안에서 나온 많은 중국계 부장품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양나라는 백제가 다시금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에 남겼다. 『양서』에 따르면 무령왕은 521년(무령왕 21)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여러 차례 고구려를 무찔렀으나, 이제 더불어 통호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양서』는 이 내용 뒤에 이어서 백제가 다시금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무령왕은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고구려 영토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그로 인해 고구려의 침입 또한 여러 차례 당해야 했지만, 한성 함락 이후 군사적으로 일방적인 수세에 있던 백제가 공세적인 모습을 취할 정도로 국력을 회복했음을 알 수 있다.


2. 한강 유역 탈환과 신라의 배신

  523년 백제를 중흥시킨 무령왕이 사망한 후 그 아들인 성왕(聖王) 이 왕위에 올랐다. 성왕은 부왕이 이룬 업적을 계승하는 한편 백제가 과거에 누렸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538년(성왕 16) 도읍을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夫餘)로 개칭하였다. 웅진으로의 천도가 한성 함락이라는 불의의 사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넓은 평야 지대를 끼고 있으며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 사비로의 천도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거대한 전망을 위한 것이었다. 성왕은 사비 천도 이후 착실히 체제 정비를 진행하는 한편 과거 백제의 중심지였던 한성과 한강 유역의 수복을 추진하였다.

  551년(성왕 29) 백제는 신라와 연계하여 일시에 고구려의 남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단행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고구려는 국내 정세가 혼란한 상태였고, 서북쪽으로는 돌궐 세력이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었던 터라 백제와 신라 양국의 연합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서기』에는 545년 고구려에서 있었던 정치적 변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안원왕 말년에 왕비 세력들이 관여된 중앙 귀족들 간의 왕위계승 분쟁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두 세력이 싸움을 벌여 패한 측에서는 2000여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고구려 내부 상황이 이처럼 심각하였기 때문에 551년에 있었던 백제와 신라의 군사 행위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 지역, 신라는 상류의 10개 지역을 각각 차지하였다. 475년 한성을 잃은 이후 남쪽으로 쫓겨 와 오랜 기간 절치부심하였던 백제의 비원(悲願)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553년 신라가 돌연 백제가 확보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빼앗고 새롭게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백제를 배제한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 있었다. 고구려로서는 내란의 여파를 정리하고 서북쪽의 외침까지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남부 국경의 문제를 일단락하고 싶었다. 신라는 신라대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고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한강 하류 지역을 손에 넣고 싶었다. 이에 함흥평야 지역과 한강 하류에 대한 신라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양국이 은밀하게 동맹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은 552년의 어느 시기인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는 553년 고구려의 묵인과 지원 아래 백제의 영역이었던 한강 하류에 대한 군사 행동에 과감히 나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관산성에서의 큰 싸움

  힘들게 되찾은 옛 땅을 고스란히 다시 잃게 된 백제는 충격에 빠졌다. 배신감에 휩싸인 성왕은 그간 고구려를 향했던 창끝을 신라로 돌렸다. 가야와 왜의 지원을 받아 신라에 대한 대규모 보복전을 시작한 것이다.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은 554년(성왕 32) 후에 위덕왕(威德王)이 되는 왕자 창(昌)의 지휘 하에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관산성이 있던 곳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 지역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대전에서 옥천으로 진입하는 도로의 남쪽 산 정상부에 있는 삼성산성 터를 관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삼성산성은 그다지 규모가 큰 성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에 과연 이 성이 그 유명한 관산성일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삼성산성 터

  초반 전세는 백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신라에서는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백제군의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관산성 전투에 동원된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정확한 규모가 얼마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신라 측이 집계한 전과를 참고하였을 때 적어도 3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투에 임한 백제 측의 분노와 결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 주는 숫자라 할 수 있다. 

  신라로서도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전쟁에서 패하면 힘들게 손에 넣은 한강 유역의 상실은 물론이고 나라의 명운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이에 신라는 한강 유역에 새롭게 설치된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과 그가 이끄는 병력을 새로 전장에 투입하였다. 김무력은 다름아닌 김유신의 할아버지이다.

  백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던 관산성 전투의 양상은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돌변하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성왕은 아들인 창을 위로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였는데, 백제군과 합류하기 전에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성왕이 목숨을 잃은 곳으로는 충청북도 옥천의 월전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월전리에는 성왕의 사절지를 알리는 비도 세워져 있으나, 이러한 전설을 그대로 신뢰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동선상 아들인 여창을 응원하러 온 성왕이 이곳까지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성왕이 사망한 정확한 위치를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성왕 전사지라는 전설이 남아 있는 월정리의 구진벼루

 『삼국사기』에서는 성왕을 죽여 공을 세운 이가 김무력의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였다고 전한다. 삼년산군은 충청북도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을 의미한다. 

삼년산성 정문의 복원된 성벽

  『일본서기』에는 성왕의 죽음에 대하여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성왕을 사로잡은 자는 신라의 좌지촌(佐知村) 출신의 말을 기르는 노비 고도(苦都)였다고 한다. 천한 신분의 고도는 사로잡힌 성왕에게 절을 한 후 머리를 벨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고, 성왕은 왕의 머리를 노비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고도가 재차 요구하자 결국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소 설화적인 측면이 있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면도 있다. 하지만 백제인들 사이에 전해지던 성왕의 최후 모습이었던 것은 사실이라 여겨진다. 『일본서기』에는 또 다른 전승으로 성왕의 잘린 머리를 신라가 북청(北廳) 계단 아래 묻고,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하였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 역시 사실이라기보다는 백제인들이 신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분노와 적개심이 반영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성왕의 죽음이 알려지자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 반면 신라군의 사기는 크게 고양되었다. 기세를 탄 신라군은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고 백제군은 붕괴되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백제의 좌평(佐平) 4명을 비롯해 2만 9,700명에 달하는 적병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최전선에서 백제군을 지휘하던 왕자 창은 가까스로 신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할 수 있었다. 백제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4. 관산성 전투의 영향

  관산성 전투는 한반도 역사의 흐름을 가름하는 큰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신라는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고, 백제와 손을 잡고 전투에 참여한 가야 세력들의 운명 또한 신라의 손에 넘어갔다. 오랜 기간 힘든 시기를 보내다 중흥에 성공하는 듯했던 백제는 다시 좌절하였다. 고토 회복의 비원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왕을 비롯해 수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낸 참패로 인해 적지 않은 시간 위축된 시기를 보내야 했다. 관산성 전투를 주도했던 왕자 창은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크게 좁아진 정치적 입지 아래서 힘들게 국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신라에 수세적인 모습을 보이던 백제는 무왕(武王)대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와 대등한 군사적 대결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관산성 전투와 성왕의 죽음으로 인해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 백제와 신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의자왕(義慈王)대에는 고구려와 연계하여 고립되어 있는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강 유역을 장악하여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있던 신라는 바다 건너에서 새로운 동맹을 찾아냈다. 바로 신흥 제국 당(唐)이었다. 나당 연합군의 결성은 삼국시대의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결국 한강 유역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확정지은 관산성 전투가 신라가 주도하는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사건의 초석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