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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김헌창의 난, 신라 멸망의 전조

by kirang 2017. 5. 29.

1. 원성왕의 즉위와 김주원의 퇴진

  785년 선덕왕(宣德王)이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죽으며 신라에서는 왕위 계승을 둔 갈등이 발생하였다. 차기 왕으로 가장 유력했던 사람은 친족인 김주원(金周元)이었다. 그는 무열왕의 후손으로, 혜공왕(惠恭王)대 시중(侍中)의 직을 지냈던 신라 정계의 중심인물이었다. 군신(群臣)들은 후사를 논의한 결과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김주원의 집은 경주 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갑자기 큰 비가 와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건너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어떤 이가 폭우가 내린 것은 하늘이 뜻이라 말하며 덕망이 높은 김경신(金敬信)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자고 제안하여 왕위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그가 바로 원성왕(元聖王)이다.

  원성왕은 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12대손으로 혜공왕대 말에 왕궁을 범한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고 선덕왕이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우며 상대등(上大等)의 직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한 만큼 과단성이 있고 무력의 사용에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전승에서는 알천의 물이 불어 김주원이 오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원성왕에게 왕위가 돌아간 것처럼 설명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김경신이 무력을 이용해 신속하게 왕궁을 장악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위 계승에 실패한 김주원은 신라의 중앙 정계에서 퇴진하여 자신의 근거지였던 명주(溟州)(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지역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2.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다

  원성왕 이후 그의 자손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수명이 짧거나 반란에 휘말려 시해되는 등 재위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30여 년이 지나 원성왕의 손자인 헌덕왕(憲德王)이 왕위에 있던 822(헌덕왕 14)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킬 당시 김헌창은 웅천주도독이었으며, 장안(長安)이라는 국호를 내세우고 경운(慶雲) 원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명목은 자신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신라 정부의 시각이고, 그가 원성왕계의 경계와 감시 대상이 되어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을 떠돌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이 실질적인 이유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김헌창은 잠시 시중의 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 청주도독(菁州都督) 등 지방직을 계속 떠돌았으며, 난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다시 웅천주도독에 임명되었던 터였다.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 무진주(武珍州), 완산주(完山州), 청주(菁州), 사벌주(沙伐州)가 가세하였고, 국원경(國原京), 서원경(西原京), 금관경(金官京)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가세하였다. 신라의 9개 주 중 무려 5개 주가 반란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반면 한산주(漢山州), 우두주(牛頭州), 삽량주(歃良州)3개 주와 패강진(浿江鎭), 북원경(北原京) 등은 김헌창이 난을 일으킬 것을 미리 알고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수비하였다고 한다. 김헌창의 반란이 이처럼 삽시간에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중앙 권력에 대한 지방의 불만이 그만큼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 반란의 진압과 그 여진(餘震)

  반란 소식을 접한 신라 조정은 경악하였다. 급히 장수 8명에게 왕도의 8()을 지키도록 한 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출병하였다. 선발로 일길찬 장웅(張雄)이 출발한 데 이어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 제릉(悌凌)이 그 뒤를 이었고, 이찬 김균정(金均貞), 잡찬 김웅원(金雄元), 대아찬 김우징(金祐徵) 등이 삼군을 통솔하여 출병하였다.

  김헌창은 주요 도로를 장악한 채 진압군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장웅이 도동현(道冬峴)에서 적을 격퇴하고, 위공과 제릉이 장웅의 군대에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각지에서 진압군이 산발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반란의 중심지인 웅진(熊津)에 모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김헌창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간신히 성으로 피신한 후 농성하였으나, 진압군의 거센 공격에 10일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김헌창은 성이 함락되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신은 종자(從者)가 목을 잘라 머리와 몸을 각각 묻어 두었으나, 성이 함락된 이후 진압군이 시신을 찾아내어 다시 베었다. 이후 그를 따랐던 종족(宗族)과 도당(徒黨) 239명이 처형되었다.

  하지만 반란의 불꽃은 아직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었다. 825(헌덕왕 17)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산적인 수신(壽神) 100여 명과 반역을 모의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는 빠르게 진압되었고 김범문도 잡혀 죽었지만 신라 조정으로서는 3년 전 전국적으로 번졌던 반란을 생각하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난의 성격과 이후의 영향

  김헌창의 난은 나라 전체를 뒤흔든 대규모 반란이었으나 의외로 쉽게 진압되었다. 차별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던 신라의 중앙 정부에 대한 지방의 불만과 만나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번졌을 뿐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자체는 그다지 체계와 준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주원의 근거지로서 김헌창의 가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명주가 오히려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김헌창은 난을 일으키며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장안(長安)이라는 국호를 내세웠다. 새로운 국호 아래 고구려, 백제, 가야계 사람들을 모두 포섭하기 수단이었다고 여겨진다. 신라 말 진성여왕(眞聖女王)대 전국적으로 일어난 대규모 반란에서는 궁예(弓裔)견훤(甄萱)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계승을 내세우며 큰 효과를 보았는데, 지방민들의 이러한 인식은 김헌창의 난 때 이미 그 폭발성의 일단(一端)을 보였던 셈이다.

  신라 조정도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였다. 김헌창의 난 이후 지방을 대상으로 한 회유책들을 시행하여, 관등제나 골품제의 운용에 있어 지방민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었다. 차별적인 신분제의 운용과 중앙에 권력이 독점된 상황이 유지되는 한 신라가 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은 해결될 수 없었다. 천년 왕국 신라는 결국 서서히 체제의 붕괴라는 결말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김헌창의 난은 이를 예고하는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