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시티즌 AT9031-52L"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계는 그중 시간이라는 축의 좌표를 알려 주는 도구이다. 인간은 무한한 시간에 일정한 규칙을 부여하여 단위를 쪼개고 가공하여 이용한다. 이를 시각화하여 보여 주는 것이 시계이다.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 하나씩은 소유하고 있는 시대이다. 자연히 손목 시계의 효용성은 과거에 비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목 시계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간을 알기 위한 용도를 넘어서, 고도의 기술력과 형태미가 집약되어 있는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에 있을 것이다. 이를 사치나 허영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자신의 재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소소한 사치 역시 유한한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시계를 살 것인가. 손목 시계의 경우 디지털 방식을 제외하면 크게 오토매틱과 쿼츠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오토매틱은 과거 손으로 일일이 태엽을 감는 방식에서 진화한 것으로, 손목에 차고 있으면 일상 생활에서의 팔의 움직임을 통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방식이다. 시계를 풀고 며칠 동안 방치해 놓으면 자연히 작동을 멈추게 된다. 때문에 여러 개의 오토매틱 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주 착용하지 않는 시계가 멈춰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거치대를 장만해 놓기도 한다. 물론 우리같은 장삼이사들과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오토매틱 시계가 가지고 있는 큰 단점은 시간 오차의 문제이다. 기계식이다 보니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오차율이 크다. 하루에 수초 정도의 오차가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시계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직접 시간을 교정해 주어야 한다. 심지어 몇 년에 한 번씩은 시계 전체를 분해하여 각 부품에 기름칠을 하고 소제를 하는 등 관리를 해야 한다. 이를 오버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쿼츠 방식의 시계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배터리로 움직이는 시계라고 보면 된다. 집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면 대개 조그만 글씨로 'Quartz'라고 씌여 있을 것이다. 쿼츠 시계는 오토매틱 시계에 비해 가격대가 저렴한 데다 오차율도 훨씬 적다. 따라서 쿼츠 시계는 등장하자마자 기존의 기계식 시계를 빠르게 대체하였다. 현재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시계는 바로 쿼츠 시계이다. 이것만 보면 쿼츠 시계가 오토매틱 시계보다 훨씬 좋아 보인다. 하지만 손목 시계의 영역에서는 오토매틱을 쿼츠보다 고급스러운 시계로 여기며, 가격대도 훨씬 높다. '사치품'인 시계에 공예적 성격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오토매틱 방식의 시계는 여러 모로 손이 많이 가는 불편한 물건이다. 하지만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 부품들의 작동으로 움직이는 오토매틱은 단순히 배터리로 움직이는 쿼츠와 달리 사람의 마음에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그 때문인지 오토매틱 시계 중에는 뒷면을 투명하게 하여 부품들이 화려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일부 시계는 아예 앞 면에 그러한 모습을 노출하는 경우도 있다. 오토매틱에는 시각적 허영심을 채워 주는 '보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내가 선택한 시계는 결국 쿼츠 방식인 시티즌 AT9031-52L 이었다. 이는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시간의 정확성이다. 시계의 본령은 결국 시간을 알려 주는 데 있고, 따라서 정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아무리 감성에 호소한다고 하여도 끊임 없이 시간을 교정해야 하는 시계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AT9031-52L은 전파 수신 방식의 시계이다. 매일 새벽 자동으로 라디오 전파를 수신하여 표준시로 정확히 맞춰 주는 기능이 있다. 전파 수신을 하기 위해서는 라디오 전파의 발신지인 도쿄 쪽, 즉 남쪽 창가에 놓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기는 하다. 일단 전파 수신이 되면 우리나라 표준시와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작동한다.
원한다면 수동으로 자기가 편할 때 언제나 전파 수신을 시도할 수도 있다. 지형상의 문제, 낮 시간대 다른 전파들의 간섭 등으로 전파 수신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크게 신경쓰이는 문제는 아니다. AT9031-52L은 시간 오차가 한달에 2~3초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정확한 시계이기 때문에 전파 수신은 몇 달에 한 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둘째, 태양광을 이용해 충전을 하는 에코 드라이브 방식이라는 점이다. 쿼츠 시계의 단점은 배터리가 떨어지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데 있다. 일정 기간에 한 번씩 시계 뒷면을 따서 배터리를 교체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에코 드라이브는 태양광으로 배터리를 충전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햇볕 아래 두고 몇 시간만 충전해 두면 그것만으로도 몇 개월치의 에너지가 축적된다. 심지어 형광등의 빛으로도 미미하게나마 충전이 된다고 한다. 일상적으로 시계를 사용하다보면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저절로 충전이 이루어지므로, 배터리에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다.
셋째, 무게이다. 오토매틱 시계는 들어가는 부품이 많다보니 무겁다. 매장에 가서 해밀턴의 오토매틱 시계를 한번 차보았는데, 도저히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겠다 싶었다. 실용성을 생각하면 손목 시계는 가벼운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AT9031-52L은 쿼츠 방식이기 때문에 오토매틱 시계보다 훨씬 가볍다. 다만 줄이 금속이라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내 경우는 1년 정도 차다가 줄을 가죽으로 교체하였는데 진작 교체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특별히 금속줄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과감히 가죽줄로 교체해 사용하기를 권한다.
넷째,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이다. 일반적으로 시계 한쪽에는 날짜가 표시되는데 한 달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2월은 28일, 그 외의 달은 30일과 31일이 교차되며, 윤년일 경우에는 2월이 29일이 된다. 따라서 일반 캘린더 기능이 있는 시계는 월초에 날짜를 교정해 주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AT9031-52L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한번 세팅해 놓으면 윤년까지 다 계산하여 정확한 날짜가 표시된다. 매뉴얼에 따르면 2100년까지 정확하게 기능한다고 하니,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시계의 날짜 기능에 신경쓸 일은 없을 것이다.
다섯째, 유리가 사파이어 글래스라는 점이다. 손목 시계를 살 때는 돈을 좀 더 주더라도 앞면 유리가 사파이어 글래스인 시계를 사는 것이 좋다. 손목 시계를 사용하다면 본의 아니게 여기 저기 긁히는 일이 생기게 마련인데, 사파이어 글래스는 기스에 매우 강하다. AT9031-52L의 경우 2년간 사용했음에도 유리에 실기스 하나 발생하지 않았다. 사용한 기간과 상관없이 깔끔한 외양이 유지되기 때문에 언제나 새 시계를 차는 느낌을 준다.
나는 위의 다섯 가지 이유로 시계를 선택하였고, 현재 매우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오토매틱 시계를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기계식 시계의 매력은 인정하지만, 쿼츠 시계의 첨단 기술력을 누리는 매력 역시 상당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추가 내용
시계를 구입한지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금속 부분에는 어느새 때도 끼고 여기 저기 긁힌 자국도 생겼다. 하지만 유리만큼은 여전히 새 것처럼 깔끔하다. 5년만에 표준시와의 오차를 체크해보니 3초 정도 차이가 났다. 5년간 시간 보정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음에도 겨우 이 정도 오차라면 정확성 측면에서 아주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이 시계는 라디오 전파 수신 기능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매일 밤 새벽에 자동으로 라디오 전파를 수신해서 표준시와 동기화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라디오 전파 수신이라는 게 다소 복불복이다. 성공하는 날이 있고, 실패하는 날이 있다. 기본적으로 정확한 시계이다 보니 혹 라디오 전파 수신 성공률이 낮아서 100번에 한 번(기간으로는 약 3달만에 한 번 성공) 꼴로 성공하더라도 기껏해야 10여 초 정도 오차가 발생했다가 바로잡히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