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 때 조선군에 화살을 보급한 조선 수군은 충청수군? 경기수군?
임진왜란 시 행주산성에서의 싸움과 관련해 자료를 찾아보다가 의문이 드는 점을 발견하였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행주대첩시 경기도 수군절도사인 이빈이 화살 지원을 하였다는 내용이 굉장히 많이 눈에 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와는 전혀 다른 기록이 확인된다.
경희가 아뢰기를,
"그날 적이 물러갈 때에 마침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이 양천 포구를 뒤덮고 왔으니 그 성원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심희수가 아뢰기를,
"대개 오늘의 일은 천행입니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구원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여러 장수들의 성세가 서로 의지되었기 때문에 중국군이 이미 물러갔는데도 적들은 그 유무를 알 수가 없으므로 이튿날 다시 오지 않은 것이니 이 또한 천행입니다. 전라도 군사가 비록 정예라고는 하지만 경계를 넘으면 힘써 싸우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죽기로써 싸웠으니, 이것은 반드시 장수가 독전한 공입니다."
하고, 경희가 아뢰기를,
"그날 묘시(卯時)로부터 신시(申時)에 이르도록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 병사(忠淸兵使) 정걸(丁傑)이 화살을 운반해 와 위급을 구해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용병(用兵)을 당할 만하던가?"
하니, 경희가 아뢰기를,
"이번의 전투에서는 적이 화살을 맞아 죽는 자가 줄을 잇는데도 오히려 진격만 하고 후퇴하지를 않았으니 이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전투시에는 돌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곳에서는 돌이 많았기 때문에 모든 군사들이 다투어 돌을 던져 싸움을 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가 거의 죽을 뻔했구나."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24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2월 24일 기사에는 행주산성 전투에 참여하였던 고산현감 신경희가 선조를 만나 전투 내용을 보고한 기록이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행주산성에서 장기간 전투로 화살이 거의 떨어진 상황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인 정걸(丁傑)이 화살을 보급해 주어 위급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이빈이 아니라, 충청도 수군절도사 정걸이 권율을 지원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경희는 행주대첩에 직접 참여했던 당사자이고,또 전투 직후에 왕을 대면한 채 이루어진 보고이므로, 이 증언은 굉장히 사료적 가치가 높다.(실록에는 정걸이 '충청병사'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로 보인다. 다른 기록을 보면 정걸은 '충청수사'로 확인된다)
그럼 이빈이 경기수사로서 행주대첩 시 화살을 공급하였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선조실록"을 검색해 보았는데 이러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체찰사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치계하였다. "이달 12일 오시(午時)에 이빈(李薲)이 치보(馳報)하기를 ‘경성 안의 왜적이 많이들 양천(陽川)으로 나가 권율(權慄)의 진을 침범하여 지금 한창 접전하고 있다.’ 하기에, 신이 임진에 나아가 각 진 및 의병들에게 명하여 급속히 달려가 구원하도록 했습니다. 13일 새벽이 이빈이 또 치보하기를, ‘본진 소속의 군인이 권율의 진으로부터 와서 하는 말이 「왜적이 3위(衛)로 나누어 나오는데 각각 홍·백·적색의 3색기를 가졌고 포위하여 접전한 지 한참 만에 3위가 모두 아군에 패배하여 죽은 자가 매우 많고 결국에는 도망갔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19일
도체찰사 풍원 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치계하였다."경성에 있는 적의 무리가 12일의 행주 전투로 인하여 사망자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의 말이 모두 같습니다. 15일에 충청 수사 정걸(丁傑)이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용산창(龍山倉) 아래에 다달아 왜적을 향하여 포를 쏘았는데, 강변에 진을 친 왜병의 거의 2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 신은 재차 권율을 독려하여 돌아가 행주 산성을 지키게 하고 싶었으나 목책과 영루(營壘)가 이미 모두 타버려 군사들이 웅거할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임시로 파주 뒷산에 머물러 이빈(李薲)·고언백(高彦伯) 등과 고기 비늘처럼 진을 치게 했습니다......."
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25일
"선조실록" 26년 2월 19일 기사를 보면 류성용이 이빈의 보고를 받아 다시 조정에 전달한 내용이 있다. 이빈이 '‘경성 안의 왜적이 많이들 양천(陽川)으로 나가 권율(權慄)의 진을 침범하여 지금 한창 접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또 2월 25일 기록을 보면 권율이 행주대첩 이후 행주산성에서 물러나 파주 뒷산에 다시 진을 꾸렸다고 하는데 이때 이빈과 고언백이 고기비늘처럼 함께 진을 쳤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빈이 파주에서 권율과 함께 진을 쳤다는 내용이다. 이건 이빈이 수군이 아니라 육군을 이끌고 있다는 뜻이다. 기록을 더 찾아보니 2월 28일에는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전을 보니 순변사는 '조선시대 변방의 군국기무를 순찰하기 위하여 왕명을 띠고 파견되던 특사'라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려지는 결론은 행주대첩 당시 이빈은 육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혹, 경기수군절도사와 순변사를 겸직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지금으로서는 딱히 찾아볼 여력도 없다. 분명한 건 이빈은 선단을 이끌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선조 26년 2월 25일 기록을 보면 같은 달 15일에 충청수사 정걸이 수군을 이끌고 용산창 아래서 왜적을 향해 포를 쏘았다는 보고가 있다. 즉, 행주대첩이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정걸이 충청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왜군과 교전을 하였던 것은 서로 다른 기록을 통해 교차 검증이 된다. 내 결론은 행주대첩 당시 권율의 군대에 화살을 보급해 준 수군은 이빈이 아니라 정걸이 이끄는 충청수군으로 파악하는 게 합당해 보인다는 것이다.
* 추가
실록을 다시 검색하다가 이빈과 관련한 내용을 찾아냈다.
이빈이 행주대첩 때 화살을 보급하였다는 내용은 "선조실록"이 아니라 "선조수정실록"에 실려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경성에는 적들이 연합하여 둔을 치고 있었으므로 그 기세가 등등하였는데, 권율은 명나라 군사와 연대하여 경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머물려 두고 있었다. 그리고는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케 하고, 권율 자신은 정병(精兵) 4천 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책(柵)을 설치하여 방비를 하였다. 적은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새벽에 책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울려대는 징소리·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온 책 안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권율은 거듭 영을 내려 진정시켰다.
적은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진격해 왔는데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안팎이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우리 군사가 점령한 지역은 높고 험준한 데다가 뒤로는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은 올려다 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자연 맞지 않는 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는 대로 적중시켰다. 화살을 비오듯 퍼부을 때마다 적의 기세가 문득 꺾이곤 하였다. 왜적이 각자 짚단을 가지고 와 책(柵)에 불을 놓아 태우자 책 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다. 적이 서북 쪽의 책 한 간을 허물자 지키고 있던 승군(僧軍)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빼어 물러난 자 몇 사람을 베고, 다시 책을 세워 방어하였다. 화살이 거의 떨어지려 할 때 수사(水使) 이빈(李蘋)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대주었다.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백 30급이나 되었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2월 1일
이 내용을 보면 "선조실록"에서 정걸이 수행했다고 한 역할을 이빈이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기 수사 이빈이 행주대첩 때 권율 군대에 화살을 보급하였다'는 설의 사료적 근거는 바로 이 기록인 듯하다. 그럼 이것은 사실일까. 나는 이것을 오류라고 판단한다. "선조수정실록"의 같은 날에는 또 이런 기록도 있다.
당시 관군(官軍)이 기내(畿內)에 나누어 웅거하면서 권율의 군사를 위시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치니, 적이 멀리 나가서 땔나무를 할 수 없었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빈(李蘋),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이 수군을 이끌고 경강(京江) 어구에 진격하였으며, 하삼도(下三道)의 관군과 의병이 적의 길을 차단하니 적의 기세가 점점 꺾였다. 그러데 명나라 군사가 이미 멀리 물러가서 대대적으로 진공(進攻)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2월 1일
여기서는 이빈이 전라도 수사로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이 당시 전라도 수군절도사직은 2명으로, 각각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이억기가 전라우수사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이빈은 결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될 수 없다. "선조수정실록" 이빈 관련 기록의 문제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빈은 선조 26년 1월 평양 탈환 전투 직후에 순변사로 임명이 된다. 원래 이일이 순병사직을 맡아서 3,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여송의 군대와 함께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적에게 퇴로를 놓아 준 것이 문제가 되어 이빈으로 교체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빈은 1월에는 육군 병력을 이끄는 순변사였는데, 2월에는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된 셈이다. 더구나 선조 26년 5월 1일 기록을 보면 이빈은 다시 순변사로 언급되고 있다. 한마디로 "선조수정실록"의 이빈 관련 기록은 자체적으로 모순 투성이어서 신뢰하기 어렵다.
다시 "선조실록"의 이빈 관련 기록을 찾아서 교차검증을 해보자. 그는 선조 26년 1월 11일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고 하며, 실제로 2월 10일 기록에도 절도사라고 표현되어 있다. 2월 28일 기록에도 '순변사 이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행주대첩은 2월 12일에 있었던 일이니, 이빈은 행주대첩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순변사였던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그러다가 3월 27일 기록을 보면 드디어 '경기 수사 이빈'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또 5월 3일에는 '수사 정걸과 이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마침 3월 20일 기록에 선조가 "이빈은 흉학하고 게으르기 비할 데 없으니 장수에는 합당하지 않다"는 평을 내려서 그를 교체시키는 논의가 있었으므로, 아마도 3월 말 경에 기존의 '평안도 병마절도사 혹은 순변사' 직에서 해임되고 '경기 수사'직을 새로 맡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이빈은 행주대첩이 있고나서 한달이 지나서야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된 것이다. 그러다 6월 21일 기록을 보면 다시 '경기 수사 이빈'에 대한 파직 논의가 확인되며, 7월 20일에는 다시 '순변사 이빈'으로 호칭되고 있다.
이상의 검토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빈이 행주대첩 당시 배에 화살을 실어 권율을 지원하였다는 설은 기록의 착종으로 인한 오류로 판단된다. 당연히 행주대첩 당시 화살을 공급해 준 사람은 충청수사였던 정걸로 보아야 한다. 이 같은 혼란이 발생한 원인은 "선조수정실록" 찬자의 실수 때문이다. "선조수정실록"의 찬자는 행주대첩 당시 한강에 나타나 응원을 한 '전라도 조운선'과 '충청도 수군 절도사 정걸의 화살 보급 활약'과 나중에 '경기도 수군절도사가 된 이빈'을 뒤섞어버린 엉터리 서술을 하였다. '전라도 수군절도사인 이빈이 권율에게 화살을 보급해 도와 주었다'고 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이순신과 이억기라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나중 사람들이 '전라도 수군절도사인 이빈이 권율을 도와 주었다'에서 '경기도 수군절도사인 이빈이 권율을 도와 주었다'고 직책만 바꾸어 인식하였다. 실제로는 직책뿐만 아니라 행위의 주체부터가 잘못된 서술이었는데 말이다.
상기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판단해 보면, 이빈은 행주대첩 당시 딱히 한 일이 없다. 그냥 류성용한테 '권율이 일본군하고 심하게 싸우고 있답니다'라고 보고한 것 정도가 전부이다. 행주대첩 당시 이빈이 경기수군의 배에 화살을 싣고 와 권율에게 보급해 주었다는 것은 제대로 고증되지 않은 잘못된 지식이 인터넷 상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