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바이올렛 에버가든"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13회짜리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은 곧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바이올렛은 어떠한 연유인지 인간으로서의 감정과 표현을 배우지 못한 채 성장하여 전장에서 인간 병기로 이용된 소녀이다. 본 작품은 전쟁이 끝난 후 바이올렛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직업인 '자동 수기 인형'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 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러 가지 참고가 된 작품들이 연상되는 애니메이션이다. 과거 무자비한 살육을 벌였던 경력을 가지고 있으나 현시점에서는 불살의 의지를 가지게 된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는 "바람의 검심", 몸에 익은 군인스러운 행동과 말투 때문에 일상에서 여러 해프닝을 발생킨다는 점에서는 "풀 메탈 패닉", 땋아 올린 금발에 푸른 눈, 레이스가 달린 흰색과 청색 계열의 의복 등 주인공의 외모 면에서는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주요 매개체가 편지라는 점과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같은 정서도 있다.
바이올렛의 직업인 '자동 수기 인형'은 편지 대필가를 의미한다.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 혹은 글을 쓸 줄 알아도 전문적인 작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서비스 직종이다. 작품 속 세계관에서는 꽤 선망받는 직업으로 묘사된다. 대략 지금의 스튜어디스와 비슷한 이미지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다만 어째서 직종의 이름이 '자동 수기 인형'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작품 내에서 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는 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자동'과 '인형'이라는 명칭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스토리를 처음 구상할 당시에는 이 직종의 종사자들이나 바이올렛을 아예 로봇으로 상정했다가 어찌어찌 스토리의 방향이 바뀌며 양 팔만 의수 형태로 남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 만약 로봇들이 인간의 감정을 대신 표현해 전달하는 대필가 직역에 종사한다는 설정이었다면, 역설적이기도 하고 재미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동 수기 인형'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이상한 일이다. 대필업에 굳이 여성만 종사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 소비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대필가'라는 지루한 명칭보다는 '자동 수기 인형'이라는 신비스러운 명칭이 나을 것이고,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아름다운 외모에 화려하고 멋진 옷을 입고 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른바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개연성을 작품 내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하였다는 건 좀 문제다.
바이올렛은 전쟁 막바지에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양 팔에 금속으로 된 의수를 하고 있다. 의수라고는 하지만 실제 손과 형태나 기능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작품 내 세계관이 전체적으로 1차 세계 대전 정도의 문명 수준으로 설정된 것 같은데, 의수만큼은 지금도 구현할 수 없는 하이테크놀로지이다. 의수가 이식된 바이올렛의 상태를 SF식으로 표현하자면 전형적인 '사이보그'이다. 이러한 설정만 놓고 보면 액션물로서의 요건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요 테마가 바이올렛이 과거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참회와 괴로움 등인 만큼, 액션의 쾌감보다는 폭력의 고통을 묘사하는 데 더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야기 구조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주인공 바이올렛이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는 단막극 형태이다. 각 단막극들의 실제 주인공은 바이올렛보다는 그를 고용한 의뢰인이다.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바이올렛의 역할은 의뢰인들의 생각이나 행동에 계기를 마련해 주는 보조적 형태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이나 관계에 대해 백지에 가까웠던 바이올렛 역시 착실하게 성장해 간다.
설정이나 인물 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이 충분치 않은 부분들도 있다. 가령 바이올렛과 길베르트 소령 간에 처음 인간적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은 생략 내지 축약되어 있어 길베르트 소령이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바이올렛이 병적(?)으로 길베르트를 따르는 이유 같은 것을 알기 어렵다. 그리고 전쟁이나 군대 시스템에 대한 작가의 이해도가 다소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전장터에서 일개 소령이 계급도 없는 미성년자 한명을 사적으로 데리고 다니며 작전에 투입한다든지 하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 육지 내에서의 작전을 해군한테 맡긴다든지 하는 것도 이러저러한 핑계를 제시하고는 있지만 납득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몇 가지 지적을 하기는 했지만,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그런 아쉬운 점들을 덮을 만큼 장점도 많은 작품이다. 설정과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작화에도 공을 들여 시각적 즐거움이 있다. 새로운 시즌이 나온다면 기쁜 마음으로 바이올렛의 다음 이야기를 따라가고 싶다.
추신: 내용 중 길베르트 소령의 상관이 소령의 '위선'을 질책 하며 책상 위에 만년필을 신경질적으로 툭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한 사람의 만년필 애호가로서 '저러면 안 되지' 싶었다. 그런 식으로 만년필을 험하게 다루면 배럴 표면에 상처가 날 뿐 아니라 안에서 잉크가 튀어 나중에 사용할 때 손에 묻을 수가 있다. 만년필은 섬약한 필기구이므로 조심해서 다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