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보성리 벽화고분의 축조 시기는 4세기 말
2017년에 평양 지역에서 보성리 벽화고분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북한 학계에서는 이 고분의 축조 시기를 3세기 전반이라 발표하였고, 우리나라 언론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 보도한 바 있다. 그러자 사이비 역사학 측에서는 3세기 전반에 이미 평양 지역이 고구려 영역이었음이 증명되었다며, 이것으로 '낙랑군 재평양설'이 부정되었다며 고무된 모습을 보였다.
당시 나는 이 무덤을 3세기 전반으로 보는 것은 북한 학계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고분의 내용이나 형태를 보았을 때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남긴 바 있다. 그런데 올해 7월, 학술지 "고구려발해연구"64집에 이 보성리 고분에 대한 상세한 연구 논문이 실렸다. 논문 저자는 현재 연변대학에 있는 조우연이며, 논문의 제목은 '신발견 平壤 甫城里 고구려 벽화고분에 관한 一考'이다. 이 무덤의 발굴 주체는 북한 학계이지만, 중국 학자들도 일부 참여하고,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를 수행하였다.
논문의 결론은 이 벽화고분은 4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보성리 벽화고분은 바닥 부분은 벽돌을 이용하고, 벽체는 판석을 이용한 독특한 방식인데, 이는 중국식 묘제(낙랑군 무덤)인 벽돌무덤에서 고구려식의 석실분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모습으로 파악된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무덤 중에서 바닥에 벽돌을 깐 무덤은 '평양역전 벽화분'뿐인데, 이 무덤은 4세기 중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평양역전 벽화분'과 형태상 유사한 무덤이 역시 평양역 부근에서 발견된 '영화9년명 벽돌무덤(일명 동리묘)'이다. 영화9년은 동진의 연호로 353년에 해당한다.
보성리 고분의 형태는 이 '평양역전 벽화분', '영화9년명 벽돌무덤'과 비슷하다. 다만 '영화9년명 벽돌무덤'의 경우 벽면까지 벽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낙랑군의 '벽돌무덤'->고구려식 '석실봉토분'으로 이행하는 흐름에서 볼 때, 보성리 벽화고분이 고구려적 요소를 보다 더 강하게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보성리 벽화고분의 연대는 적어도 353년보다는 뒷 시기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무덤 형태의 변화를
영화9년명 벽돌무덤(353)->안악3호분(357)->평양역전벽화분(4세기 후반)->보성리 벽화고분(4세기 말)->덕흥리고분(408)
으로 정리하고 있다. 평양역전 벽화분과 보성리 벽화고분의 선후 관계에 대해서는 이견의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대체적인 편년의 흐름은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결론 : 보성리 벽화고분을 3세기 전반의 것으로 보는 건 오직 북한 학계 뿐이다. 이는 평양 지역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고 보고 싶어하는 북한 학계의 특징이며, 다른 나라 학계에서는 지지를 받지 못하는 매우 돌출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명문 자료를 통해 절대 편년이 가능한 유사한 형태의 다른 무덤들을 함께 고려해 보면, 보성리 벽화고분의 축조 시기는 4세기 말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따라서 북한 학계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쓴 신문 기사만 보고 '보성리 벽화고분의 발굴로 식민사관은 끝났다' 운운하며 의기양양했던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행태는 그냥 설레발에 불과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