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시트"
2019년 7월에 개봉한 이상근 감독, 조정석, 윤아 주연의 영화이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주인공 용남(조정석)이 동네 놀이터에서 철봉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장면을 통해 용남이 남다른 신체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정보와 그가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는 캐릭터인지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다. 영리하고 효율적인 선택이다.
이 영화에서의 재난은 도시 한복판에서 발생한 유독 가스의 방출이다. 기존에 많이 제작되었던 혜성 충돌, 화산 폭발, 지진, 쓰나미, 화재 등과 차별화되는 소재이다. 유독 가스를 묘사하는 데는 적당히 연기를 피우는 정도면 되는지라, 재난이라고 해도 엄청 스펙타클한 CG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연출을 날로 먹고 있냐 하면 그건 아니다. 높은 건물에서 클라이밍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공을 들여 묘사하는데, 충분히 실제감과 몰입감을 준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친근하고 호감이 간다는 점이다. 남자 주인공 용남뿐 아니라 여자 주인공 의주(윤아)도 매우 영리하고 유능한 인물로 묘사된다. 용남과 같은 산악부 출신이라 위기 상황에서의 생존 대처법을 잘 숙지하고 있고, 자신의 신체를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알바에 가까운 허울뿐인 부점장임에도 재난이 닥쳤을 때는 자신의 직책에서 해야 하는 행동들을 책임감 있고 딱부러지게 수행한다. 아쉬워서 엉엉 울고 땅을 치면서도 더 나쁜 상황에 놓인 약자들에게 자발적으로 구조 기회를 양보하는 소시민적 선량함도 지녔다(해당 장면에서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건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재난 영화로서 공포감과 위기감을 강조하는 영화는 아니다. 재난은 적당한 배경 정도로 주어질 뿐이며, 영화는 이를 극복하는 주인공 남녀의 캐릭터와 액션에 집중하고 있다. 두 사람은 유독 가스를 피해 더 높은 곳을 향해 건물 옥상 위를 달려 나간다. 그 와중에 두 사람이 보여 주는 연대감과 질주의 쾌감이 상당하다. 영화에서 굳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감독이 '파쿠르' 영상의 이미지를 참고한 것이 아닌가 싶다.
중간중간 다소 유치하거나 관성적인 연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비교적 군더더기 없이 재난 상황에 내던져진 청춘들의 풋풋한 질주를 위트 있게 담아 냈다. 단순한 액션 오락물 같으면서도 구석구석 은근한 사회적 메시지를 깔고 있어, 다 보고 나면 한편으로 마음에 위안이 되기도 한다.
* 덧붙임 1: 내가 대학 다닐 때 산악부는 새우깡 한 봉지를 안주 삼아 안전 헬멧에 소주를 부어 마신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동아리였는데, 이 영화 덕분에 인기가 좀 올라갈 수도 있겠다 싶다.
*덧붙임 2: 유독 가스가 광범위한 도시의 영역을 그 정도 밀도로 퍼져나갈 수 있나 싶은 의아함이 생기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