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노트

역사 창작물의 유형과 역사 왜곡의 조건

kirang 2021. 4. 19. 15:42

  인류가 수천년 간 경험한 역사는 우리가 즐기는 이야기를 창조하는 데 많은 영감을 준다. 최근 역사 드라마와 관련해 발생한 '역사왜곡' 논란도 있었기에, 역사를 활용한 창작물의 유형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1. 충실한 재현물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며 사실의 재현과 복원을 중시하는 유형이다. MBC에서 방영한 바 있는 "제○공화국" 시리즈를 비롯하여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같은 정통 사극이 이 유형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형 콘텐츠의 핵심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 대상을 눈 앞에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서양의 중세 역사 매니아라면 당시의 갑옷과 무기, 전투 방식 등을 최대한 사실과 가깝게 복원하는 데 집착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매니아가 당시 군복이나 무기의 변화 같은 것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것도 같은 이유다.

  역사 매니아가 아닌 일반인이 충실한 고증의 가치를 공감할 수 있는 사례로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들 수 있겠다. 이 드라마의 등장 인물이나 사건 자체는 허구지만, 제작진은 80년대 혹은 90년대의 소품을 최대한 구비하여 화면에 나열하는 것으로, 시청자의 향수를 자극하고 극의 사실성을 끌어올린다. 고증의 충실함은 역사 재현물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매력이자 즐거움인 것이다.

2. 재구성 및 재해석물

  앞서 살펴본 '충실한 재현물'은 본연의 매력과는 별개로, 스토리 구성 면에서 큰 제약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역사가 곧 스포일러'인 셈이라, 작가가 창작자로서의 자유를 행사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잘 알려진 거대 역사는 건드리지 않되, 그 틈새의 이야기를 짜맞추어 만들어내거나, 사건과 인물의 이면을 재해석하여 제시하는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대표적 사례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워터 게이트 사건 묘사를 들 수 있겠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정부의 불법 도청 문제로 대통령이 사임까지 하게 된 미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대사건이다. 그런데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주인공 포레스트가 한밤중에 맞은 편 객실에 손전등을 들고 침입한 괴한들을 보고, 객실등이 고장난 줄 알고 호텔 프론트에 신고한 걸로 워터케이트 사건이 발생한 것인양 익살스럽게 연출이 된다. 이는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단지 위트 있는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한 것이다.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가 백담사에 갔다가 전두환을 만나는 장면 같은 경우도 이러한 연출법에 포함될 수 있겠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 김용의 “영웅문”,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 “아마데우스”, “아이반호” 등 수많은 역사 창작물이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다른 관점에서 재구성하거나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활용한 케이스이다. 

3. 대체역사물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관용구가 흔히 쓰이지만, 그 만약을 상상하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다. 실제 역사를 활용하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실제와 다르게 전개되었다는 가정하에 이후의 가상 시간선을 다루는 것이 대체역사물이다. 일종의 평행세계이며, 순수한 역사물이라기보다 SF나 판타지 장르와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타임 슬립이라는 형태로 과거의 특정 시점에 현대인이 개입하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이 승리한 경우를 상정한 미국 드라마 “높은 성의 사나이”, 복거일 소설 “비명을 찾아서”와 이를 영화화 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 현대 의사가 에도 시기 말기로 타임슬립한 일본 드라마 “닥터 진”, 현대 이지스함이 태평양 전쟁 시기로 타임 슬립한 내용의 만화 “지팡구”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 역사와 판타지가 뒤섞인 장르이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고증이 치밀할 수록 이 장르의 재미가 더 산다는 점이다.

 

4. 시대적 특성을 배경으로만 활용하는 판타지물

  역사에서 사실성을 제거하고, 스토리 전개를 위한 배경으로서 세계관만 차용하는 경우가 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 “킹덤”, 중국 드라마 “랑야방”이 등이 이러한 케이스이다. 이러한 창작물에서는 가상의 왕이나 가상의 국가가 등장한다. 대충 우리가 알고 있는 임금이나 시대의 느낌만 낼 뿐 실제 역사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 이 유형의 경우 작가가 스토리 전개의 자유도를 무한하게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다만 실존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역사 창작물 고유의 특성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역사물보다는 판타지로서의 성격에 더 가깝다.

5. 역사적 인물의 캐릭터만을 활용한 판타지물

  앞선 유형과 달리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캐릭터성만 오려내어 유희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유명한 게임이자 애니메이션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시리즈가 여기 속한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설정도 가능하다. "페이트" 시리즈에서는 아더왕이 아예 여자로 성별이 바뀌어 등장한다.

■ 역사 창작물에서 역사 왜곡의 조건은

  역사 연구자들이 역사 창작물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대개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이 실제 역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인 중에는 이러한 역사 창작물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이를 우려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보고 신윤복이 정말 여자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식이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비판과 걱정은 너무 경직된 태도인 같다. 역사 창작물을 '재현물'로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사를 콘텐츠로 즐기는 방법이 매우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의 창작물은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며, 역사학에 종속시킬 수 없다. 

  역사 창작물의 교육적 측면에 대한 우려도 그러하다. 역사 창작물이 일반인에게 역사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맞다. 역사 창작물이 그러한 역할을 잘 수행해 준다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교육적 역할이 창작물의 의무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 교육의 책임은 역사학자나 역사 교사가 지는 게 맞다. 역사 전공자들이 창작물과 실제 역사의 차이를 짚어서 설명해 주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교육에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역사 창작물에 자유를 부여한다고 해서, 모든 역사 창작물이 동일한 가치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창작은 자유이지만 당연히 여기에는 책임이 따른다. 똑같이 역사를 소재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잘 만든 창작물과 못 만든 창작물은 엄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나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존중이 녹아 있는 작품이야말로 잘 만든 역사 창작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역사 창작물들을 보면, 고증을 극의 발목을 잡는 짐덩어리 취급하는 경향이 많았다. '퓨전 사극'이라는 미명 하에 역사적 배경, 사건, 인물들을 샘플링 사용하듯 자기 멋대로 잘라 써먹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나는 이런 현상이 역사에 대한 창작물의 착취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태를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까. 비록 못마땅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저 고증이 엉망인 못 만든 창작물일 뿐이다. '역사 창작물'에 '역사 왜곡'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좀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영화 "나랏말싸미" 같은 경우는 '역사 왜곡'의 혐의를 받는 작품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라는 역사적 사건 뒤에 신미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승려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역사 창작물로서의 허용 범위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영화 개봉 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의 내용이야말로 허구가 아니라 한글 창제의 실상이라는 식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실언이었든 진심이었든,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는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영화 제작을 금전적으로 후원하였던 특정 종교가 선호하는 역사상을 널리 퍼뜨리기 위한 선전물의 역할을 부여받고 말았다. 창작물이 역사로서의 지위에 도전하게 된 셈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역사학은 학문으로서 도전에 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요컨대 역사 창작물은 상상력과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받아야 한다. 결과물에 대한 평가는 비평의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 지점에서 고증의 부정확함을 이유로 역사 왜곡의 혐의를 씌우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 기존의 역사상을 비판하거나 대체하고 스스로 역사가 되고자 표방한다면, 창작물이 아닌 역사학적 검토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검토 과정에서 논거의 미비나 자료의 편향적 이용, 의도적 불성실함이 특정한 욕망과 목적성에 입각해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면 비로소 '역사 왜곡'의 혐의를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