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과 잡담
제20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하여
kirang
2022. 3. 10. 18:11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당선자는 기호 2번의 국민의 힘 윤석열이었다. 선거 결과의 함의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남긴다.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박빙의 승부였다. 양자의 표차는 24만 7077표이며, 최종 득표율은 불과 0.73%p 차이이다. 선거 직전까지의 여론조사에서는 시종일관 윤석열이 꽤 큰 차이로 승리하는 것으로 발표되곤 했으므로, 이러한 박빙 승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방송 3사가 진행한 출구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윤석열의 승리가 예상되었음에도 국민의 힘 측은 크게 당혹해 하는 모습을, 더불어 민주당 측에서는 환호하는 기이한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당선자 윤석열은 검찰총장 출신으로, 입법이나 행정 경력이 전혀 없는 정치 초보이다. 그간 이러한 대통령 후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선까지 된 경우는 적어도 민주화 이후에는 없었다. 그가 데뷔 이후 보여준 여러 언행을 보면 과연 대통령 직을 잘 수행할 만한 정견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면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그에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는 커다른 기회를 부여하였다. 윤석열의 역량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정부 여당을 응징하는 데 무게를 둔 셈이다.
문재인 정권은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도덕성의 파산이다. 문재인 정권의 주요 인적 구성은 과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였던 이들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비주류로서 존재하였다. 또한 독재 정치와 권위주의로 대변되는 '절대 악'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집단으로서의 포지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근혜 탄핵 이후 권력을 잡고, 총선에서마저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절대 다수당이 되어 한국 사회의 주류로 올라서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윤리적 우위를 무기로 하였던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 보인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민주당 소속이었던 서울시장 박원순, 충남도지사 안희정, 부산시장 오거돈이 줄줄이 성비위로 끌어내려졌고, 경남도지사 김경수는 여론 조작이라는 선거법 위반 판결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차기 대선 후보급으로 평가되던 사람들이 비위에 연루되어 무더기로 쓸려 나가는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간 민주당이 진보, 정의, 윤리 등의 가치를 주창하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위선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지지 집단에서 속시원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문제가 된 사람들을 보수 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정략에 당한 희생자로 포장하며 적반하장 격의 태도를 보이는 모습마저 보였다. 그 정점에 있었던 것이 조국 사건이다. 중도층에게 민주당 세력은 부도덕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잘못에 대해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오만하고 후안무치한 집단이라는 인상이 확산되었다. 민주화 운동 세대의 윤리적 자산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 변명의 여지 없이 파탄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었다. 문재인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좋은 환경 하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촛불 혁명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통해 만들어진 강력한 기대와 지지를 동력으로 삼았기에, 개혁을 수행하기에 그 어느 시기보다도 좋은 여건이었다. 그러나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문재인은 대통령이 된 후 눈에 띄는 개혁 정책을 펼친 적도, 정치적 결단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준 적도 없다. 쥐어진 힘에 비해 복지부동에 가까울 정도로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예컨대 조국 사건에서 발단된 '검찰 개혁' 과정에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서로를 치고 받는 낯뜨거운 상황이 수 개월간 진행되며 정권의 권위와 리더십이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대통령이 취한 태도는 그야말로 방관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검찰을 누르겠다는 문재인 정권의 의도와 정반대로 일개 '검찰총장'의 위상이 대통령과 맞상대하는 존재 급으로 성장하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문재인 정권 핵심 관계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최우선 국정 목표는 '대통령 지키기와 퇴임 후 안전 확보'가 아니었나 싶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은 모두 말로가 좋지 않았다. 이승만은 혁명으로 쫓겨났고, 윤보선은 쿠데타로 실각했다. 박정희는 측근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최규하도 쿠데타로 실각, 전두환과 노태우는 퇴임 후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갖혔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스스로의 몸은 지킬 수 있었지만 자식들이 비리로 구속되었다. 노무현은 퇴임 후 정치 보복으로 시달림을 겪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명박도 퇴임 후 수감자 신세가 되었으며, 박근혜 역시 탄핵이 되어 임기조차 못채우고 수감되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다보니 청와대 참모진의 입장에서는 문재인의 퇴임 후 안전이 핵심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서 대통령을 최대한 분리시키고, 보기 좋은 일에만 얼굴마담 격으로 내보내 이미지 관리를 하는 의전 중심의 소극적인 국정 운영이다. 문재인은 '혁명'적인 상황을 겪고 대통령직에 오른 사람치고는 언론 기자 회견조차도 극히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통계를 보면 심지어 박근혜보다도 기자 회견을 안 했다. 하지만 이렇게 유리 안의 꽃처럼 보호받는 대상을 과연 리더라고 할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의 개인적인 인품은 크게 의심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5년 간 보인 모습을 보면 리더로서의 책임감이나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문재인의 정치 입문 과정을 보면, 본인의 의지보다 주변의 요청과 강권에 마지못해 끌려 나온 인상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에, 권력을 좋아하지도 않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사람이 앉아 있었던 셈이다.
윤석열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기 인생과 무관할 거라 생각하였을 대통령직을 손에 넣었다. 표풍과도 같은 행보였다. 천운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다. 그러나 앞으로 남아 있는 과제가 만만치 않다. 가까스로 당선은 되었지만 상대 후보인 이재명도 47.83%나 되는 득표를 하였다. 머리카락 하나 차이의 신승이었고, '비호감 대선'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상대 진영 후보에 대한 비호감이 강하게 작동한 선거였다. 국민의 절반 정도는 윤석열에 대해 앞으로도 비우호적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민주당은 여전히 국회 의석수의 절반을 크게 넘긴 초거대 정당이며, 아마도 윤석열 정권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을 것이다. 다음 총선까지 여소야대의 가시밭 정국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내각 구성을 위한 인사청문회도 만만치 않을 예정이다.
당내에서의 권력 다툼도 우려가 된다. 윤석열은 외부에서 수혈된 인사인지라 당내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차후 당내 권력 문제를 두고 기존 세력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당장 당대표인 이준석부터 윤석열과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니다.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한 안철수 또한 자신의 기여도를 주장하며 권력 지분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분란의 불씨이다. 하나하나가 윤석열의 정치 역량을 가늠하는 시험대이다.
윤석열의 반대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의 적대적 감정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망하는지 두고 보자고 꼬아 보기만 하기에는 최근 국제 정세가 너무 험악하다. 윤석열이 좋은 자문 집단의 도움을 받아 부족한 정치 경험치를 보완하고, 균형감을 갖춘 인재 등용으로 대한민국의 앞에 놓인 여러 과제들을 잘 수행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