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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랑의 백지 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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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령 전투2

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2)-전투의 전개 쌍령에서의 싸움 경상도 근왕군은 경상도 관찰사 심연(沈演)의 지휘 아래 조직되었다. 그는 경상도 좌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경상도 우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을 선봉으로 삼아 앞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후방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은 1월 2일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인 무갑산과 등리봉이 마주보이는 쌍령에 도착하였다. 허완의 좌병사군은 남쪽에, 민영의 우병사군은 북쪽에 진을 쳤다고 하므로 쌍령 고개의 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누어 진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과 쌍령의 위치 진을 치는 과정에서는 약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였다.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이 진영 위치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산 위로 진을 옮기자고 세 번이나 요청하였으나 허완에게 .. 2015. 7. 19.
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1)-배경 들어가며 쌍령 전투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투이다. 병자호란이 왕이 직접 나가 무릎을 꿇은 치욕적인 패배였고, 그 패배한 전쟁의 패배한 전투라면 그다지 기억에서 호출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랬던 쌍령 전투가 최근에는 임진왜란기의 칠천량 전투, 6.25전쟁기의 현리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이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을 받으며 새삼 주목받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인지도와 관심이 떨어지는 쌍령 전투가 당당하게 '한국사 3대 패전'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은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차이 때문이다. 쌍령 전투는 청나라 군대 300명 대 조선군 4만 명이 싸워서 조선군이 전멸을 당한 전투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정말 황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이 내용이 .. 2015.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