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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과 잡담

술 이야기

by kirang 2014. 8. 17.

나는 술을 잘 못한다. 주량은 소주 2~3잔. 맥주도  500cc를 채 마시지 못한다. 선천적으로 알코올 분해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탓에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고 취기가 올라오며 속이 역해진다.

 "손자병법" 에 나오는 사람 판별법 중에 술을 취할 때까지 먹이는 것이 있다. 취하게 되면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 두르고 있던 외피가 벗겨지고 그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본성을 드러내기도 전에 곯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알코올이 눈쪽으로 몰리는 특이 체질인지 소주 두어 잔 마시다 보면 스르르 눈꺼풀이 덮인다.

술에 약한 탓에 학부 신입생 시절에는 제법 고생을 했다. 내가 갓 입학했을 때만 해도 아직 대학 내 집단문화가 잔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강 시간이면 같은과 사람들끼리 학교 잔디밭에 둘러 앉아 파도타기로 소주나 막걸리를 들이키곤 했다. 취하는 건 둘째치고 속이 메스꺼워 못 마시겠는걸 억지로 먹이는 분위기는 정말 질색이었다. 언젠가는 파도타기로 막걸리를 마시던 중 못 마시겠으면 머리에 부으라는 야유를 듣고 실제 머리에 부어버린 적도 있다. 도저히 술이 안 넘어가던 나로서는 궁여지책으로 동원한 수단이었는데 지켜보던 선배들은 새까만 후배가 반항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비록 주량은 적지만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삼겹살이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소주가 생각나고, 더운 여름날에는 목을 타고 넘는 맥주의 시원한 청량감을 찾게 된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술집 구석에서 이런 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 술 한 잔 또한 인생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여럿이 몰려 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만취하도록 마시는 술자리만큼은 내키지 않는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듯 주량과 음주 방식도 다르다. 자신의 입맛에 맞춰 다른 이에게 먹으라고 강요하는 순간 폭력이 된다. 남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싶어하는 그 심리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술을 못하는 체질이라고 사양하여도 주량은 먹다 보면 느는 것이라면서 강권을 하는데, 자칭 '사람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는 이들은 그게 얼마나 불쾌하고 폭력적인 행동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주량이 적으면 적은대로 술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이 있는 법이다. 자기 술잔에 대한 결정권은 스스로에게 맡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