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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과 잡담

'판사 석궁 습격 사건'의 재판 속기록을 읽어보고......

by kirang 2012. 1. 20.

박훈 변호사가 인터넷에 올린 석궁 사건의 재판 속기록을 읽어 보았다. 2심에서의 2회 공판 기록데, 꽤 재미있었다. 공판기록만 읽어도 김명호 교수의 캐릭터가 확 드러난다.

인터넷에서 많은 이들이 이 속기록을 읽고 '분통이 터졌다', '꼭 읽어 보라'는 식으로 쓴 글들을 보았다. 그런데 정작 읽어 보니 김명호 교수측이 재판 중 '진상'에 가까운 언행을 보이는 데 비해 판사와 검사측에서는 황당해 하는 가운데 나름대로 자제력을 잘 발휘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감상이라서 나에겐 이게 더 놀라운 경험이었다. 동일한 텍스트를 읽었는데 이렇게 정 반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봤을 때 재판 과정에서 무리를 범하고 억지를 부리는 쪽은 오히려 김명호 측이지, 판사 쪽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김교수 측은 피해자인 박홍우 판사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논거는 다음과 같다.

1. 판사의 몸에 난 상처가 깊이 2센치 정도라서 최소 6~7cm는 관통되어야 하는석궁의 파괴력에 비하면 너무 가볍다는 점.

2. 속옷, 내복, 조끼 등에는 피가 묻어 있는데, 중간 옷인 와이셔츠에는 피가 없다는 점.

3. 피해자가 맞았다고 하는 흉기의 일부인 '부러진 화살'이 확보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

이를 바탕으로 박홍우 판사가 자작극을 벌였다는 것이고, 자작극을 벌인 동기로는 ", 이거 석궁으로 맞았다고 하면 내가 크게 되겠구나 하는 영웅심"이 발동할 가능성, "공명심, 영웅심, 치기 어린 마음" 등을 제시한다하지만 김명호 측 주장이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상처의 깊이에 대해서는 비껴서 맞으면 2cm 상처만 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당시 상황을 보면 석궁은 계단 위에서 아래쪽으로 발사되었기 때문에, 비껴서 맞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속기록을 보면 박홍우를 최초로 치료한 의사의 증언에서도 석궁이 거의 90도로 비껴 맞았다고 한 이야기가 나온다.

또 와이셔츠에 피가 없다는 이야기는 내가 본 속기록에서는 안 나오지만, 검사 결과 결국 와이셔츠에서도 혈흔이 나왔다고 한다. 혈흔이 눈에 안 띄었던 것은 사건 후 피해자의 노모가 와이셔츠를 빨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 결과 구멍 부위에 소량의 혈흔이 검사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건 당시 경비원 등이 피해자의 상처 부위 와이셔츠가 피로 물든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김명호 측에서는 옷가지에 묻은 혈흔 감정을 주장하면서 그게 돼지 피인지 뭔지 알게 뭐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혈흔 감정은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일단 이게 '사람의 혈흔'이라는 것은 1차 공판 때 이미 다 검증이 된 것이었고, 김명호 측 주장대로 박홍우가 자해를 했다면, 자해 과정에서 나온 자기 피를 옷가지에 묻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혈흔이 박홍우의 것이라고 증명되어도  김명호측에서는 "역시 자해를 하고 자기 피를 묻혔군. 교활한 인간!"하면서 쓱 넘어가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피고측의 혈흔 감정 주장은 되든 안 되든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이라고 여겨진다.

'부러진 화살'이 없어진 것은 증거 보존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도 박홍우가 자해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그 화살을 박홍우가 숨겨서 보는 이득이 딱히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에 '영웅이 되고 싶은 공명심'에 자기 몸에 칼질을 해서 상처를 낼 정도의 사람이라면, 증거물인 화살을 없애기보다는 화살촉에 자해 과정에서 나온 피를 슬쩍 묻히는 방식으로 훨씬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다고 하는 동기가 너무 개연성이 떨어진다. 상식적으로 퇴근 길에 무방비 상태에서 흉기를 든 사람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어떨결에 막아 놓고 보니 자기가 다치는 쪽이 '영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집에 들어가서 자기 배에 칼질을 하고 나왔다는 게 이해가 가는가. 세상엔 별 희한한 일이 다 벌어지니까 설사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해도, 재판 결과에 악의를 품은 사람이 석궁과 회칼 등을 소지한 채 판사 집 앞에서 습격을 했다는 명백한 '팩트'를 참고하면, 습격 과정에서 석궁에 다쳤다고 보는 것이 자해설보다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김명호 교수가 오래 전부터 석궁 발사 연습을 해왔고, 또 석궁이라는 것이 안전 장치를 풀지 않으면 발사가 되지 않는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그가 박홍우 판사를 해하거나 위협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습격을 하였고, 석궁을 발사한 것까지는 사실이라고 여겨진다. 실제 김명호 교수도 어떻게든 석궁이 발사되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저 맞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할 뿐.

다만 이런 생각은 해 볼 수 있겠다. 석궁에 사용되는 화살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부러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혹 발사된 화살이 빗나가 벽이나 난간 같은 곳에 부딪쳐 튕기면서 박홍우 판사의 복부에 상해를 입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피해자가 복부에 맞은 화살을 뽑고 가해자와 뒤엉켜 실랑이를 하다가 계단을 구르는 과정에서 부러졌을 수도 있겠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속기록을 읽어 본 결과, 내 판단으로는 이 재판이 딱히 사법부의 횡포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름대로 상식적으로 진행된 재판이 아니었나 생각이 되고, 그보다는 김명호 교수의 '똘끼'라고 할까, 자기 중심적이고 막무가내인 점이 눈에 많이 띄었다.

피해자인 박홍우 판사가 정봉주에게 유죄를 판결한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사악한 사법부의 횡포'라는 인식틀로 이 사건에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화제가 되고 있는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그 내용이 사법부에 적대적인 시선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그러한 점을 충분히 감안하고 보아야지, 이 영화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사실'을 재현한 것이라고 인식해서도 곤란할 것 같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의도가 어떻든간에, 실제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이용될 여지도 있어 보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