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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12명의 노한 사람들"

by kirang 2014. 9. 4.


1957년에 만들어진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이다.

"12명의 노한 사람들"은 제한된 공간 안에서 논리와 대화로 진행되는 법정물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거대한 기둥으로 장식된 권위적인 법원 건물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그 안에 위치한 한 방으로 들어간다. 마침 한 살인 사건에 대한 청문이 끝난 참이다. 판사는 배심원들에게 이제 법의 유죄 여부를 판단하라고 말하고, 배심원이 지고 있는 막중한 책임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발언의 내용과 달리 판사는 한 쪽 손을 뺨에 괴고 있으며 따분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에게는 이 일이 매우 지루하고 하찮은 일상인 것이 분명하다.

장면이 바뀌고 테이블과 탁자가 있는 방 안으로 12명의 배심원들이 들어온다. 이후 영화 진행은 줄곳 이 방 안에 이루어진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이 날은 그해 여름 중 가장 더운 날이라고 한다. 하지만 웬일인지 방안의 선풍기는 작동을 하지 않는다.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치는 배심원들을 보면 방 안의 후덥지근한 기운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흡사 내 등도 땀으로 젖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화는 초반부터 관객이 마치 13번째 배심원인 양 현장에 직접 앉아 있는 느낌을 주는 데 성공한다.

배심원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1차 투표를 한다. 모두가 유죄를 확신하는 가운데 단 한 사람, 헨리 폰다가 제동을 건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오간 이야기들을 하나씩 짚어 가며 몇 가지 의문을 피력한다. 그렇다고 그가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명탐정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진상을 모르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배심원들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느끼며 짜증을 내지만, 서로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주고 받는 가운데 지금까지 자명해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난다. 유죄라고 생각하던 배심원들이 한 명 두 명 무죄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논쟁은 험악할 정도로 격렬해진다.

한정된 공간에 한정된 등장인물. 하지만 영화는 에너지가 넘치며 강한 몰입감을 준다. 논쟁이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12명 배심원들의 개성 또한 뚜렷하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남들 의견에 부화뇌동하는 가벼운 사람, 영리하지는 못하지만 성실한 사람, 완고하게 객관적 증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등. 그중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는 두 축은 헨리 폰다와 리 J. 콥이다. 헨리 폰다가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한다면, 리 J. 콥은 그 대척점에서 분노와 감성을 상징한다. 리 J. 콥의 연기는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이어서 헨리 폰다를 압도할 정도이다.

이 영화는 당연해 보이는 것에 대한 의문의 제기와 토론이 지니는 위대함을 역설한다. 누군가의 천재적인 발상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사람들끼리의 의견 개진과 소모적으로 보이는 충돌을 통해 어느새 진실이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처음에 거의 모두가 유죄라 생각했던 사건은 결국 무죄 쪽으로 결론내려졌다. 드라마틱한 반전이 이루어졌음에도 영화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을 다한 배심원들은 인사를 나누며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는 위대함을 평범함으로 수식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찬사이기도 하다.

실제 민주주의 체제는 이 영화에서처럼 이상적이지 않다. 아니, 이성과 합리보다는 분노와 편견이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여전히 최선의 선택이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반성과 교정이 가능하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배심원들이 내린 무죄 판결 역시 오류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배심원들이 거쳤던 뜨거운 과정은 결코 오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