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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책 "은하영웅전설"

by kirang 2015. 5. 1.


다나카 요시키 (지은이) | 미치하라 카츠미 (그림) | 김완 (옮긴이)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

  이 책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 훗날 인류는 점진적으로 우주를 개척하며 은하계 단위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으나 정치적으로는 퇴행을 거듭하여 은하제국이라는 왕정을 세우게 된다. 이에 왕정을 거부하는 공화주의자들이 다른 은하계로 탈출하여 자유행성동맹이라는 독립적인 정치체를 만들게 되고 양자는 치열한 체제 경쟁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수백 년에 걸친 전쟁의 와중에 두 나라에는 각각 불세출의 천재 전략가가 등장하는데 은하제국에 등장한 이는 '상승의 천재'라 불리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고, 자유행성동맹에 등장한 이는 '불패의 마술사'라 불리는 양 웬리이다. "은하영웅전설"은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저자인 다나카 요시키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소설가로, '창룡전'이나 '아루스란 전기' 같은 대중적인 글들을 쓴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이 책의 주인공 중 한 명이자 전제군주정 하의 영웅인 라인하르트가 너무 멋지게 묘사되는 반면 민주공화정인 자유행성동맹의 정치는 매우 지리멸렬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우익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며 오독이다.

  다나카 요시키는 작품 내에서 전체주의나 우익에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은하영웅전설에서 묘사되는 은하제국의 골덴바움 왕조는 나치 독일을 투사한 것이며,초대 황제인 루돌프 골덴바움이 누가 보아도 히틀러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다나카 요시키는 골덴바움 왕조로 상징되는 전제정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가운데 그 대척점에 있는 자유행성동맹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이는 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올바른 체제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스스로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대중들, 즉 현대 일본 국민들에 대한 자괴감의 표출에 가깝다. 작중 등장하는 우국기사단 역시 현대 일본의 우익단체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SF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가상 역사물 내지 판타지물이다. 자유행성동맹이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를 다루는 공간이라면 은하제국은 고대 영웅 서사물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라인하르트는 현대 정치에 등장하는 독재자라기 보다 고대의 영웅, 예를 들면 알렉산더 대왕 같은 인물이다. 따라서 작가가 전제군주인 라인하르트를 멋지게 묘사하는 것은 그가 우익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호고주의'적 기호에 따른 것으로 보는 게 옳겠다. 다만 "은하영웅전설"의 마무리가 입헌군주정으로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종결되는 것을 보면 작가의 국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체제가 가장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디선가 일본인들은 은하제국의 라인하르트를 더 좋아하고, 한국인들은 자유행성동맹의 양 웬리를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사실이라면 흥미로운 점이다. 천황에 해당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경외감은 일본 대중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일본 드라마에서는 어느 회사에 문제가 있더라도 그건 회장직을 노리는 2인자의 전횡이나 음모로 인한 것이라는 식의 전개가 많다. 회장은 대개 모종의 이유로 부재중이거나 있더라도 말이 없고 지켜만 보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그렇다고 딱히 무능한 존재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2인자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을 격려한다던지 조용히 도움을 준다던지, 혹은 막판에 나타나 '회장님은 사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존재로 묘사되곤 한다. 일본인들이 제국에 더 감정이입을 한다면 그건 형식적으로라도 천황제 아래 살고 있는 '신민'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국인의 경우는 그 반대일 것이고.

  한편 은하영웅전설에서 '정치 혐오'의 징후가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한윤형의 글 '본격 은영전 비평 : 양 웬리와 탈정치성' http://weirdhat.net/xe/ahriman/30497). 한윤형이 지적한 문제는 버밀리온 회전에서 양의 군대가 라인하르트를 무너뜨린 시점에서 하이네센에서 온 항복 명령에 승복한 것, 그리고 그에게서 보이는 '정치 혐오자'로서의 징후가 민주 시민으로서 건강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캐릭터의 개성이라는 측면을 감안하면 다소 과도한 해석이라고 본다. 

  양 웬리라는 캐릭터는 정치 혐오자라기보다 그냥 정치가라는 직업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다. 정치가란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전파하고 중의를 모아 그 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양 웬리는 내성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캐릭터이다. 즉, 나름의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퍼뜨리거나 강제하는 데는 소극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것을 그냥 기질의 문제로 본다. 은일자 내지 방관자로서의 비판 지점을 찾아낼 수는 있겠지만, 양 웬리가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방기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양 웬리는 정치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으면서도 꼬박꼬박 투표에는 참석할 유형의 인물이다. 이 정도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으로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은 하는 셈이다.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이 말씀에 따르면 청소년기에 읽었을 때 감동이 배가되는 책들이 있다고 하였다. 청소년기의 감수성이 성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라는데,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생각해보니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와는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은하영웅전설" 역시 청소년기에 읽는 게 좋다고 여겨지는 책이다. 이건 꼭 칭찬의 의미는 아닌데, 이 책의 세계관이 상당히 단순한 측면이 있어서 머리가 굵어진 후 읽기에는 유치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는 이 책의 적절 독서 연령은 '중학생~대학생 저학년' 정도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은 나이가 중학교 1학년~2학년 시기였는데,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을 최대한으로 만끽하고자 한다면 가능한 이른 나이에 읽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