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조대왕의 등장
태조대왕(太祖大王)은 고구려의 제6대왕이다. 줄여서 태조왕이라고도 하며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궁(宮)이다. 『삼국사기』에는 어렸을 때 이름이 어수(於漱)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궁은 중국 쪽에 전해지는 이름이고, 어수는 고구려에서 자체적으로 전승되었던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태조대왕의 아버지는 유리왕(琉璃王)의 아들인 재사(再思)이고, 어머니는 부여 출신이라고 전한다.
태조대왕 앞의 왕은 모본왕(慕本王)이다.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는가 하면, 함부로 죽이기까지 하였다. 폭정을 펼치던 모본왕은 결국 자신의 시중을 들던 모본 사람 두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태자가 있었지만 나라 사람들은 그가 어리석다고 하여 궁으로 하여금 대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때 태조대왕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고, 어렸을 적부터 뛰어나게 영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왕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으므로 한동안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고 한다.
2. 전쟁과 영토 확장
태조대왕 치세의 고구려는 사방으로의 영토 확장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한(漢) 나라와의 전쟁은 물론 주변 소국들에 대한 병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태조대왕이 여러 차례 요동 지역을 침입하여 한나라를 괴롭혔음을 전하고 있다. 태조왕은 중국 군현들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토벌군이 일어나면 거짓으로 화의를 청하였다가 잊혀질만하면 다시 습격을 반복하는 등 기만 전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한나라를 곤욕스럽게 하였던 듯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56년(태조대왕 4) 동옥저를 정벌하였다. 그 결과 국경이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청천강]에 이르게 되었다. 68년(태조대왕 16)에는 갈사국이 항복해 왔고, 72년(태조대왕 20)에는 관나부의 패자(沛者) 달가를 시켜 조나(藻那)라는 소국을 정벌하는가 하면, 74년(태조대왕 22)에는 환나부의 패자 설유를 시켜 주나(朱那)라는 소국을 정벌하였다.
이때 고구려에 복속된 조나와 주나 등은 독자적인 지역집단이나 정치체 중 하나이다. ‘나(那)’라는 것은 ‘노(奴)’와도 통하는 것으로, 땅[壤] 또는 내[川]와 천변(川邊)의 평야를 뜻하는 말이다. 이 시기 정치체들이 대개 천변이나 계곡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나(那)’라는 형태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의 경우 5개의 부(部)로 이루어진 국가인데, 이중 계루부를 제외한 나머지 4개부는 모두 ‘○나부(那部)’라는 형태의 부명을 공유하고 있다. 즉, 고구려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 역시 원래는 개별적인 정치체인 나국이었으나, 유력한 나국들이 연맹하면서 부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98년(태조대왕 46)에는 나라의 동쪽 국경인 책성을 돌아보았다.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열고 관리들에게 물건을 하사하였으며 바위에 공적을 기록하였다. 태조대왕이 책성으로 간 것은 봄 3월이었는데, 왕도로 돌아온 것은 겨울인 10월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책성만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그동안 확장시킨 고구려 영토를 순수(巡守)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대왕은 114년(태조대왕 62)에도 남해(南海) 지역을 두루 살피고 돌아다니는 등 순수 행보를 이어갔다.
121년(태조대왕 69)에는 한나라와의 큰 싸움이 있었다. 봄에 유주 자사를 비롯해 현도 태수, 요동 태수 등이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고구려를 공격하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자, 태조대왕은 동생인 수성(遂成)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 맞서 싸우게 하였다. 수성은 거짓 항복을 하는 등 기만술을 사용하여 적들을 방심시켰다가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성곽을 태우고 2,000여 명을 살상하였다.
한나라군의 구원 병력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구려군이 철수한 뒤였다. 같은 해 여름에는 요동의 선비족 8,000여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약탈하였고, 추격해 오는 요동 태수와 그 이하 관속들을 살해하였다. 고구려군은 가을에 수천 명의 군대로 현도군을 포위하였는데, 부여에서 현도군을 지원하는 병력을 보내어 패해 물러나기도 하였다. 이 기사에서는 태조대왕 궁이 주변의 이민족들을 포섭하여 군사 작전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또한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동원하여 현도군을 포위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마한은 한반도 중남부에 존재한 정치체이다. 이는 지리적 격절성을 감안할 때 납득하기 힘든 서술이다. 따라서 어딘가 오류가 있는 기록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3. 어질지 못한 동생에게 나라를 물려주다
수성은 태조대왕의 친동생으로 날쌔고 용감하였으나 인자함이 적은 성품을 가진 이였다. 그는 태조대왕이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군사를 이끌고 큰 활약을 하였다. 호방한 성품을 가져서일까. 수성은 야심 또한 작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는 그를 따르는 주변 신하들이 태조대왕이 이미 늙었음에도 왕위를 수성에게 물려주지 않음을 비난하고, 미리 계획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수성은 처음에 짐짓 사양하는 듯한 언행을 보였지만 이미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직언하는 이를 해하기도 하였다.
수성이 반란의 조짐을 보이자 우보(右輔) 벼슬을 하던 고복장이 태조대왕에게 수성을 죽이지 않으면 자손들에게 해가 갈 것임을 경고하였다. 하지만 태조대왕은 이미 나이를 먹고 늙어 사리 판단이 어두워져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146년(태조대왕 94)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차대왕(次大王)은 자신의 심복들을 높은 관직을 맡기는 한편 고복장을 죽이고, 태조대왕의 맏아들인 막근까지 죽였다. 그 동생 막덕 역시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여겨 스스로 목을 매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충신과 두 아들을 잃은 태조대왕은 165년(차대왕 20) 별궁에서 1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 태조대왕대 기록에 대한 의문들
태조대왕에 대한 기록은 있는 그대로 믿기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대단히 많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수명은 119세에 달한다. 그의 동생으로 전하는 차대왕과 신대왕(新大王)의 수명 또한 각각 95세와 91세로 이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생각해 보면 정상적이라 보기 어렵다. 물론 장수왕(長壽王)의 경우처럼 실제 장수를 할 수는 있으나 삼형제가 나란히 비정상적으로 긴 수명을 보인다는 것은 의아한 점이 아닐 수 없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기록에서는 수성이 태조대왕 궁의 사자(嗣子)라고 하여 두 사람을 부자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둘 사이를 형제로 서술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내용과 차이가 나는 점이다. 이는 수성과 백고의 관계에서도 되풀이된다. 『후한서』에서는 수성과 백고도 부자 관계로 서술하고 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형제 관계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의 비일치성 때문에 태조대왕과 차대왕 수성, 신대왕 백고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제기된 바 있다.
기록상에 보이는 모순점들도 있다. 『후한서』에 따르면 121년에 태조대왕 궁이 사망하고 수성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이때 한나라 조정에서는 궁의 사망을 틈타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였는데, 남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은 의리에 맞지 않다고 하여 중지되었다. 다음해인 122년에 수성이 포로를 송환하는 등 한나라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에 응하며 조서(詔書)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세하게 당시 정황을 남기고 있는 기록을 감안하면 태조대왕 궁의 사망을 121년으로 보는 것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태조대왕의 죽음을 165년으로 전하여 『후한서』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문제의 121년에 태조대왕이 수성에게 군국의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다분히 『후한서』의 내용을 염두에 둔 보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태조대왕은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 준 이후에도 19년이나 생존하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해에 마침 차대왕이 시해되고 신대왕이 새로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도 작위적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태조대왕을 비롯해 그 형제 왕들의 기록에 보이는 이 같은 모순점들 때문에 고구려 역사에서 모본왕과 태조대왕 사이에 단층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모본왕 사망 후 고구려 내부에서 상당 기간 정치적 혼란이 발생하였고, 이를 극복한 인물이 곧 태조대왕이라는 것이다. 혼란을 극복하여 새로운 질서와 왕계를 만들어낸 태조왕계와 그 이전에 존재하던 고구려 왕계를 인위적으로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태조왕의 수명과 재위 연수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이는 태조왕부터 왕실의 성이 고씨(高氏)로 기록되는 반면 그 이전인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후한서』에서는 고구려의 왕위가 원래 소노부에서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 나중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태조왕대를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위가 넘어간 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전환은 그보다 훨씬 일찍 이루어진 것이며 태조왕의 등장은 계루부 내에서의 왕실 교체라고 보기도 한다.
많은 의문점을 가지고 있는 태조대왕의 기록이지만, 신뢰할 수 없다고 하여 사료적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도 곤란하다. 태조대왕을 비롯한 고구려 초기 왕계와 그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어쨌든 당대에 고구려인들에 손에 의해 정리되었던 것들이다. 이들 기록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지혜를 모아 그 속에 담겨 있는 진실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것이 역사학들의 역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