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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조선구마사" 의주 기생집의 중국 음식과 장소성

by kirang 2021. 4. 12.

  "조선구마사" 폐지 문제와 관련해 팟캐스트 녹음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추이를 체크하기 위해 구글링을 하던 도중 나무위키에 관련 항목이 만들어진 것을 파악하였다. 2021년 4월 초 기준 해당 항목의 서술은 "조선구마사"에 부정적인 기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작품이 판타지 사극이라는 핑계를 무기삼아 노골적으로 문화공정을 하는 정황이 파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식으로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채 물타기를 시도하는 정황이 나오고 있다."(나무위키, 조선구마사 항목, 8.2 조기 조영 이후)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무위키 작성자의 주장과 달리 '문화공정을 하는 정황'은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조선구마사"가 중국에 의한 문화공정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객관적 사실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근거와 논리를 갖추어져야 한다. 

   나무위키 작성자는 "조선구마사"와 관련해 내가 하였던 "중앙일보" 인터뷰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였다.

"한국 고대사를 전공한 기경량 조교수의 의견을 실었는데, 해당 조교수의 인터뷰 중 마치 '작중 시대에는 의주에서 무역이 발달했다'는 식의 실언이 나왔다. 의주가 무역이 흥하게 된 건 조선 후기 인삼재배, 가공기술 발달 및 수출이 이루어지면서부터이다. 평소에 이덕일 류의 환단고기 유사역사학을 냉철하게 비판하던 해당 인물답지 않은 실수이다."(나무위키, 조선구마사 항목, 8.2 조기 조영 이후)

  해당 문장 뒤에는 각주를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언되었다.

"참고로 기경량이 비판했던 이덕일은 한국 근현대사 쪽에서는 전공자이지만 고대사 해석에서 물의를 일으킨 경우이고, 이번에는 고대사 전공 기경량 조교수가 근세사 부분에서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기초적인 부분을 틀렸다. 한국 고대사 분야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상상력이 많이 필요한 분야이고, 한국 근세사, 근현대사는 사료가 말 그대로 썩어넘쳐서 상상력보다는 다양한 사료에서 필요한 부분을 잘 추출해서 연구, 분석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즉 연구 방식 하나만큼은 서로 180도 다른 분야이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 고대사 석학이 근세사에서 엉뚱한 예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나무위키, 조선구마사 항목, 8.2 조기 조영 이후, 각주13)

  이에 대해 몇 가지 지적을 하고자 한다.

1. 나는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연구자이기는 하지만 '석학'은 아니다. 따라서 '석학'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2. 한국사에서 시대별로 연구 방법론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자기 전공이 아닌 아닌 다른 시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맞다. 사실 나는 다른 시대사 뿐 아니라 내 전공 분야인 고대사에서도 자신 없는 부분이 많고, 언제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

3. 다만 나무위키 작성자의 말처럼 내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기초적인 부분을 틀렸"고, "실언을 하였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의주 지역의 상업 활동과 관련하여 임진왜란 이후 활성화된 중강개시와 후시를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러한 교과서적 지식이 역사의 전부는 아니다.

  의주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지역으로 한반도와 요동 지역을 이어주는 교통의 핵심이다. 고래로 사람과 물자가 이곳을 거쳐갈 수밖에 없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의주의 강 건너편은 지금의 단동(丹東)이며, 고구려 때 동천왕과 미천왕의 공격한 바 있던 서안평(西安平)이 바로 이곳이다.

  의주는 고려시대에 보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고려 말 원간섭기에는 요동 지역과 한반도 간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 많은 고려인들이 요양, 심양 지역으로 옮겨가 살았고, 고려의 왕은 원에 의해 심양왕(瀋陽王)으로 책봉되어 이 지역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자연히 이 무렵 고려와 요동을 연결하는 핵심 요지인 보주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고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의주의 지리적 입지가 조선 시대라고 해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조선 초에도 의주 지역에서는 많은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조선구마사"의 실제 시대적 배경인 "태종실록"의 기록을 가져와 살펴보자.

"'박초의 천성은 본래부터 청렴하지 못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그를 쓰심이 불가하다고 여겨집니다. 또 의주(義州)는 경계가 중국과 연접하여 저 나라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무역할 물건을 가지고 왕래함이 잇닿아 끊이지 아니하니 제주(濟州)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진실로 청렴하지 못한 사람을 임사할 곳이 아니오니, 다시 청렴 공정한 사람을 택하여 차견(差遣)하게 하소서.'"(태종실록, 17년(1417) 윤5월 18일 2번째 기사 )

  내용인즉 태종이 박초라는 인물에게 관직을 주고 의주에 부임시키고자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흠지라는 신하가 박초는 청렴하지 않은 사람이라며 반대하는 내용이다. 특히 의주는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어 물자가 오고가는 곳이므로, 청렴하지 않은 사람이 부임하기에 더욱 부적절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기사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에 의주 지역에서 밀무역과 같은 상행위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조선구마사"에서처럼 조선 초 태종대에 의주 지역에 실제로 중국 음식을 파는 주점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외국과의 교류가 많았던 국경 지역에 그런 주점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 정도는 충분히 개연성을 가질 수 있다. "조선구마사"의 제작진은 월병, 피단, 중국식 만두 등이 등장한 문제의 장면에 대해 국경지대에 있는 '의주'라는 장소성을 보여 주기 위한 연출이었다고 해명하였다. 나는 이 해명이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조선구마사"에서는 이 장면 외에도 음식이 등장하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양녕대군이 아버지의 명으로 도성 관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자신의 정인인 어리를 막사에 끌어들여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주안상으로 보이는 상차림이 짧게 비치는데, 이건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한식이다.

  충녕대군이 머물고 있던 의주 기방의 상차림과 양녕대군이 머물고 있던 도성 한양의 상차림은 아주 대비된다. 전자는 음식을 담고 있는 그릇도 거칠고 음식도 저급해 보인다. 반면 후자는 그릇부터 고급스러운 놋기이고, 음식들도 정갈하며 색채도 아름답다. 중국 음식은 손으로 뜯어 먹는 형태로 야만스러운 느낌을 주며, 붉은색과 어두운 녹색으로 연출된 화면 색감까지 더해 기괴한 느낌마저 부여한다.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정반대의 연출이다. 반면 한식은 젓가락과 수저가 갖추어져 있어 문화적으로 보이고, 화려하고 화사한 색감으로 먹음직스럽게 연출되고 있다.

  두 장면의 대비는 '변경 VS 도성'이라는 장소성을 보여 주는 한편, 셋째 아들로서 '쓰여지고 버려지는 처지'의 충녕대군과 앞으로 '보위를 물려받을 세자'로서의 양녕대군의 처지를 보여 주는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구마사"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의주 기방의 문제 장면은 중국 음식을 조선의 음식이라고 뒤집어 씌워 선전하는 목적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중국 음식을 저급하고, 기괴하게 묘사할 이유가 없다. 만약 한국의 콘텐츠를 이용해 중국 음식을 홍보할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중국 음식을 최대한 아름답고 화려하게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이 드라마에서 중국 음식은 저급하게, 한식은 고급스럽게 연출되었다. "조선구마사"의 이러한 묘사 방식을 보면 오히려 중국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비하로 해석할 여지조차 있다.

  "조선구마사"는 문제의 장면으로 인해 중국이 수행한 문화 침략의 결과물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이에 흉흉한 여론이 비등하며 많은 배우와 스텝의 노력이 투입된 콘텐츠는 제대로 된 비평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이건 그냥 '오발사고'에 가깝다. 안타까운 일이다.

 

* 추가 사항_2021년 4월 25일

본 글의 내용에 대해 덧글을 통해 논쟁을 하였다. 본문에서는 "조선구마사" 논쟁과 관련해 가장 직접적인 자료인 "태종실록"의 사례만 소개하였으나, 이 기록 하나만으로는 납득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듯하여, 조선 초 의주가 중국과의 접경지로서 교류와 상업이 이루어지는 지역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몇개를 더 제시하였다. 다음과 같다.

 

"서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 조온(趙溫)이 보고하였다. '진왕부(秦王府)에서 사람을 보내어 소[牛]를 무역하기 위하여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승지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도평의사사에 의논해서 진왕부에 회답할 자문(咨文)을 지어 오게 하였다."["태조실록", 2년(1393) 4월 16일]
  *명나라의 진왕(秦王)은 주원장의 둘째 아들 주상(朱樉)을 가리킴.

"의정부에서 호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요동(遼東)의 호송군(護送軍)이 의주에 이르게 되면, 서울 장사꾼들과 그 고을 사람들이 가는 베[細布]와 인삼 등 금지품을 많이 가지고 몰래 숨어서 사고팔고 하니, 실로 미편한 일입니다.'..."["세종실록", 27년(1445) 1월 18일]

"권주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이 앞서 중국 사신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사사로이 무역(貿易)을 하는데 더러는 말을 사가지고 돌아가는 자가 있다 하였습니다...... 의주 사람들이 살펴볼 겨를도 없이 그들이 구하는 것을 따라 값을 치러 주려고 말까지 팔아서 저 사람들에게 주는 자가 매우 많다......'" ["성종실록", 19년(1488) 5월 7일]

"권주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암말 값은 면포(綿布) 5, 6필에 지나지 않는데, 단자(緞子)로 한 필을 얻는다면, 이익(利益)이 갑절이나 되기 때문에, 법(法)으로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동(遼東) 사람들이 의주(義州) 사람과 왕래(往來)하면서 이웃마을과 같이 교제(交際)합니다......" ["성종실록", 24년(1493) 4월 13일]

 

  위에 제시한 것 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맥락의 사료가 매우 많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료의 일관성이 보여 주는 역사상은 명확하다. 의주 지역은 조선 초에도 중국과의 접경지로서 교류와 상업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기에 시작된 중강무역은 의주가 국제적인 무역도시로서 규모적으로 성장하는 데 획기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이라고 해서 의주가 중국과의 교류와 무역이 일절 없는 지역이었던 양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삼성이 반도체와 스마트폰 사업을 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그 이전 시기에는 삼성이 대기업이 아니었다거나, 혹은 아예 사업 자체를 한 적도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선구마사"를 비난하는 이들은 조선 초 의주 지역에 중국 음식이 나오는 술집이 나오는 건 '역사왜곡'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만 보아도 이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의주 지역에 중국 음식이 나오는 술집의 존재'가 역사 콘텐츠에서 상상조차 허용해서는 안 되는 역사왜곡이라는 주장은 그냥 말이 안 되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