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면, 전형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인류의 긴 역사를 보면 지금 당면한 문제와 유사한 문제를 과거에도 겪었던 경우가 많고, 이는 현재의 우리에게 의미 있는 통찰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의 긴장이 높아지자, 주식 분석가들은 과거 전쟁이 발생했을 때 주가 흐름의 역사적 사례를 조사하고 대응 전략을 제시하였다. 조사에 따르면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는 주가가 하락세를 보이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오히려 바닥을 찍고 상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확정되는 순간 전세계 주가는 엄청난 변동성을 보이며 급락을 하였다가 그 직후 다시 급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과거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주가의 상승 기조가 이어질 지, 아니면 과거와 반대로 추가 하락을 하게될지 실제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예측은 예측일 뿐이고, 복잡계로 이루어진 현실은 공식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역사의 효용에 대한 일반론과 반대로, 역사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지금 맞닥뜨린 문제에 대한 대응에 경직성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나는 문득 우리 정부가 취하고 있는 외교적 스탠스가 그러한 경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본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라크에 파병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노무현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들에게 예를 들었던 것이 광해군의 중립 외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한 중립 외교야말로 당시 상황에서 정답이었다는 역사 해석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실력도 없고 현실감도 없는 인조 정권이 대책도 없이 명에 사대하고 후금을 적대시하다가, 전쟁을 초래하고 비참한 굴욕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물론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불변의 정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당장 광해군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등거리 중립 외교를 펼쳤다고 보는 평가부터 타당한지 따져보아야 한다. 광해군은 어쨌든 명의 요청을 수용하여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였다. 설사 인조 반정이 일어나지 않아 광해군이 계속 왕위에 있었다 치더라도, 당시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리론과 명분론을 감안하면 명이 건재한 상황에서 황제를 자칭하는 청의 홍타이지를 명의 황제와 동급의 존재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청의 침공이 조선이 취했던 외교 노선과 무관하게, 물자 확보와 후방 정리라는 청 내부의 자체적인 동인이 결정적이었다는 일각의 연구도 있다. 결국 인조 아니라 광해군이 왕이었더라도 병자호란의 비극을 피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제관계는 냉혹하므로, 외교에서는 명분이 아니라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맞다. 그런 면이 있다. 그런데 '나는 실리를 추구한다'고 대놓고 표방하는 것이 정말 외교적 실리를 보장해 줄까. 세상에 대놓고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실리를 전면에 내세운 중립 외교는 모든 세력에게 신뢰를 잃고 고립을 자초하는 헛똑똑이의 행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실리 추구를 표방함으로 실리를 잃는 역설인 셈이다.
강대국이라면 외교에서 '실리'를 내세우는 것도 가능하다. 어차피 그 실리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강대국이 아니라면, 오히려 보편적인 '명분'과 '도리'를 강조하고 국제 여론에 명분을 호소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할 수도 있다.
'중립'에 대한 강박은 역사에서 이미 '정답'을 확인했다는 확신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단면적이고 허약한 믿음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시공간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별개의 일이며, 과거의 역사 전개가 현재와 미래의 흐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문제는 결국 현재의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 모든 걸 다 떠나서,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을 펼친 것을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자랑하는 현 정권이 우크라이나 문제에 지극히 소극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놀랍다. 우리는 80년 광주에서 고립되어 감당하기 힘든 폭력에 저항하였던 사람들을 상기하며 가슴 아파하곤 한다. 그런데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일방적인 폭력에 직면한 사람들의 심정과 절박함이 과연 80년 광주의 그것과 크게 다를까. 외국에서 벌어진 비극을 외면하는 것이 우리나라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할 수는 있다. 그런 태도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과 민주화 운동의 경력을 가진 유력 정치인들이, 그리고 광주 정신의 계승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그런 스탠스를 취하는 모습이 나는 쉽사리 납득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