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의 고구려 원정과 안시성 싸움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7세기 중반에 있었던 고구려와 당의 전쟁 흐름을 정리해 보았다.

1. 당태종 고구려 정벌을 시작하다. 

  서기 645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단행한다. 당 연호로는 정관 19년의 일이고 고구려에서는 보장왕 4년의 일이다. 당시 신라엔 선덕여왕이, 백제엔 의자왕이 집권하고 있었다. 

  당태종은 장량을 평양도 행군총관에 임명하여 군사 5만을 주고 전함 500척을 이용해 해로로 평양을 향하게 하였다. 육로에서는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강하왕 도종을 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을 주어 요동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자신은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이들을 뒤따르기로 하였다.

  고구려 원정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일단 수륙 약군을 합해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출전 전에 수군을 이끄는 장량에게는 장안과 낙양에서 모은 군사 3,000명을 덧붙여 주었고, 육군을 이끄는 이세적에게는 난주(蘭州), 하주(河州) 2곳에서 항복한 호병(胡兵)을 더해 주었다. '호병'이란 이민족 병사를 말하는 것인데, 아마도 뒤에 등장하는 돌궐군을 말하는 것 같다. 호병의 정확한 수는 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전투에서의 활약상을 보면 대규모 병력인 것 같지는 않다. 실제 전투에서의 모습을 감안하면 2,000명 정도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들은 그렇다 치고 당태종 본인이 이끄는 친위부대 6군의 규모가 문제가 되는데, 이것이 좀 모호하다. 한어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따르면 6군(六軍)에서의 군(軍)은 일반적으로 1만 2,500명으로 구성된다고 하니 '6군'이라면 산술적으로 7만 5,000명이 된다. 그러나 ‘6군’은 황제가 이끄는 군대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당의 고구려 침공군의 규모는 적게 잡으면 10만 정도, 많이 잡으면 20만 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당군의 성공적인 진격

  645년 4월, 당의 육군 사령관인 이세적이 요하를 건넌다. 당시 고구려의 방어체계는 요하를 해자로 삼아 그 동쪽에 여러 성들이 동북쪽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사선으로 늘어서 1차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북쪽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늘어서 있는 신성, 개모성, 백암성, 요동성, 안시성, 건안성 등이 주요한 거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세적은 우선 개모성을 함락시켜 포로 1만 혹은 2만 명을 획득한다(포로의 수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때 양곡 10만 석을 노획하는 성과를 함께 올린다.

  5월에는 당의 수군(수군이라고는 하지만 함대전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아니라 해안선을 따라 배를 타고 진격하는 이들이다)이 지금의 발해만 끝 해안 쪽의 비사성을 공격해 남녀 8천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후 이세적은 요동성을 공략하게 되고, 당태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고구려 진공 작전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요택(요하 연안의 저습지)에 이른다.
 
  요동성은 고구려에서 흔치 않은 평지성이자, 과거 수나라 양제의 100만 대군이 몰려 왔을 때도 함락되지 않았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고구려의 요동 거점 중에서도 간판격이라 할 수 있는 성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싸움은 양쪽 모두에게 대단히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신성과 국내성에서 4만 명의 구원병을 급히 파견하여 요동성을 지원한다. 당군의 도종이 4,000의 기병으로 이를 막으려 시도하지만, 첫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위세에 눌려 패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다음 전투에서는 도종의 적극적인 공세와 때마침 도착한 이세적군의 합류로 고구려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전투에 패한 고구려 구원병이 흩어진 것과 맞추어 당태종도 요동성 앞에 도착하였다. 전투에 승리한 데다 황제가 친히 임하였으니 당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리라. 당군은 당태종의 지휘하에 포차와 충차 등 공성병기를 이용한 대공세를 퍼부었고, 결국 요동성은 함락된다. 이때 요동성의 병사 중에 불에 타 죽은 이가 1만 여 명, 포로가 된 자가 1만 여 명이며, 양민은 남녀 4만 여 명이 잡히고, 양곡은 50만 석을 빼앗겼다고 전한다. 뒷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요동성에는 주몽을 섬기는 사당이 있었는데, 이곳의 무녀가 주몽이 요동성을 지켜줄 것이라는 허황된 발언을 하여 성민들이 방심을 하였다고도 한다.

  수양제의 100만 대군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요동성 함락은 고구려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군의 다음 목표인 백암성은 포위되자마자 성주인 손대음(혹은 손벌음)이 앞장 서 항복을 한다. 이에 당태종은 손대음을 그곳 자사로 임명하여 다른 고구려 성주들에게 무익한 저항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백암성의 남녀 1만 명과 병사 2,400명이 고스란히 당군의 수중에 넘어간다.

  그 다음 안시성과 건안성 중 어느 곳을 칠 것인지 제장과 의논을 하는데, 진공로 앞에 놓인 성을 하나하나 모두 함락시키며 진공하자는 신중론이 채택되어 안시성으로 진군을 한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상황이 급박해졌다. 안시성과 건안성마저 무너지면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을 지휘관으로 삼아 말갈병을 포함한 15만 명의 구원군을 급파한다.

3. 안시성 구원군과의 결전

  고연수는 안시성 동쪽 40리 지점에 진을 치고 당군과 대치를 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고연수가 출진할  당시 고구려 대로인 고정의가 정면승부는 피하고 시간을 끌며 장기전을 벌이면 필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동안 고구려가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울 때마다 사용하였던 전통적인 전술이다. 수나라 대군을 막아냈던 을지문덕의 전술 역시 이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고연수는 병력수에 있어서 우위에 있다고 여겼던 탓인지 그러한 조언을 따르지 않고 정면승부를 택했다.

  당태종은 아사나두이라는 돌궐인 장군에게 기병 1,000명을 주어 적을 유인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호병'이란 바로 이들을 말하는 것 같다. 고구려군은 말갈군을 앞세워 이를 추격하였고, 안시성 동쪽 8리 지점까지 전진하여 산기슭에 진을 쳤다. 사서에 따르면 당태종은 근처 산에 직접 올라가 지형과 적의 진형을 살피다가 고구려군의 군세가 엄청난 것을 보고 얼굴에 두려워 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다. 이에 도종이 자신에게 별동군 5,000명을 주면 뒤를 돌아 평양으로 진격하여 단번에 적의 배후를 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실제로 도종의 제의는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이다. 당장 눈 앞에 고구려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는데 큰 전투를 앞두고 5,000명의 병사를 나누어 스스로 병력을 줄이는 것도 말이 안 되고고, 요동에 위치한 안시성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과연 별동대가 평양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당태종은 고연수에게 ‘자신은 연개소문의 죄상을 따지러 왔을 뿐 싸움을 원하는 것은 아니며, 고구려가 신하의 예만 갖추면 빼앗은 성을 돌려주고 물러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낸다. 물론 이것은 기만이었으나 그것이 방심을 부른 것이었을까. 당태종은 밤에 몰래 장수들을 소집하여 고연수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포위할 것을 지시한다. 이세적에게는 보병과 기병 1만 5,000명을 주어 서쪽 산에 위치하게 하고, 장손무기에게 정병 1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후방으로 돌아 협곡에 숨어 있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기병 4,000을 거느리고 고구려 진영 북쪽 산에 올랐다. 밤 사이에 고연수의 고구려군은 꼼짝 없이 동, 서, 북으로 포위되었다. 다음날 아침, 삼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는 당군의 공격에 고구려군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대활약한 사람이 바로 설인귀로, 귀신같이 싸움을 잘 하는 설인귀를 본 당태종은 그를 유격장군에 임명하고, 한미한 출신이었던 그는 이후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신당서》에 따르면 이때 당군이 벤 고구려군의 머리가 2만 급이었다고 하고, 《구당서》에서는 1만 급, 《삼국사기》에서는 3만 여인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서마다 수치가 다르기는 하지만 고구려군이 당태종의 전술에 말려 대패한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황급히 남은 무리를 수습한 고연수는 산을 등 지고 굳게 지키려 했으나 당군이 동쪽 하천의 다리를 끊는 등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좁히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항복한 숫자는《구당서》에서는 15만 6,800명, 《삼국사기》에서는 3만 6,800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태종은 항복한 고구려군에서 우두머리급 3,500명을 가려 벼슬을 주어 중국 내지로 보내었고, 나머지 일반 병사들은 모두 방면하였다. 다만 말갈인 3,300명은 모두 목을 베어 구덩이에 파묻었다. 당군이 노획한 전리품은 말이 5만 필, 소가 5만 마리, 갑옷 1만 벌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노획물 숫자는 사서들의 기록이 모두 일치한다. 문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의 항복한 사람수 차이인데, 15만 6,800명으로 기록한 《구당서》와 3만 6,800명으로 기록한 《삼국사기》 중에서 후자가 보다 설득력 있다고 여겨진다. 고구려가 파견한 구원병이 실제 15만 명이었다고 하더라도 전투를 통해 전군이 붕괴된 상황에서 항복한 숫자가 15만 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아마 《구당서》는 붕괴되기 전의 고구려군 군세를 모두 포함해 서술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고구려가 안시성 구원군으로 15만의 병력을 파견했다는 이 기록은 다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고구려 역사상 10만이 넘는 대병력을 동원한 경우는 이 사례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구려 전성기 광개토왕이 한반도와 만주를 휘젓고 다녔을 때의 활용한 병력도 5만 명 남짓에 불과하다. 고구려의 대당 전쟁은 고구려 말기의 일이므로 광개토왕대와 인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고구려 국력이 그 정도에 이르렀을까 싶다. 신라가 통일 전쟁시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한 병력이 5만이었다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결국 15만이라는 안시성 구원군 병력이 정규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급하게 모집한 비정규군이 다수 포함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한차례의 포위 공격에 전군이 삽시간에 붕괴된 것도 그렇고, 고연수가 아직 상당한 병력이 남았음에도 자포자기해 항복한 것도 그렇고, 당태종이 적의 병력에 플러스가 될 수도 있는 포로들을 그냥 방면해 준 것을 보아도 그렇다. 놓아 주어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그에 비해 탁월한 전투력을 지닌 말갈인들은 남김 없이 죽였는데, 이는 풀어줄 경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아무튼 당태종은 전투 결과에 흡족해 하며 자신이 진을 쳤던 산 이름을 주필산으로 고치고, 장군들에게 파진도를 그려 후세 병법가들에게 참고가 되게 하였으며, 기념비를 만들어 세웠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하늘의 도움에 감사하며 말에서 내려 두 번이나 절을 했다고 한다. 한편 눈 앞에서 자국의 대규모 구원군이 전멸하는 것을 지켜본 안시성 입장에서는 악몽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필산 전투 직후 고구려인들은 큰 충격을 받고 후황성과 은성이 저절로 함락되는가 하면 근처 수백 리 인가에서 사람들이 사라져 연기가 끊기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제 안시성마저 무너지면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은 완벽하게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4. 안시성에서의 공방전

   안시성의 성주는 강단이 있고 성을 방어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도 안시성주가 따르지 않아 군사를 보내 쳐 보기도 하였으나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에 연개소문도 어쩔 수가 없어 안시성주를 그대로 용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처럼 지방 세력의 독자적인 행위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고구려가 귀족연립체제였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왕 이후 고구려 왕권은 서서히 그 힘을 잃게 되고 급기야는 귀족들에 의해 좌우되는 시기가 도래한다. 당시 귀족들은 도성에서 사병들을 이용해 전투를 벌이기도 했는데, 이때 고구려 왕은 성문을 닫고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이 같은 정국의 혼란 속에서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기게 된 것으로, 한강 유역의 상실은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던 고구려 귀족들에게 위기감을 주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서로의 독자적 권리를 인정하면서 대표인 대대로를 선출해 정국을 맡기는 귀족연립체제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연개소문 집안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집안이었다.

  안시성주는 당태종이 성 앞에 나타날 때마다 북을 치고 요란하게 소리를 질러 화를 돋구는 심리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당태종이 화를 내자, 이세적은 성을 함락시킨 후 안시성민을 몰살시키자고 건의하였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성민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더욱 굳세게 성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당태종은 고연수, 고혜진을 비롯한 항복한 고구려인들을 앞세워 성 안의 사람들을 부르는 등 역심리전을 펼쳤지만 효과는 보지 못하였다.

   당태종은 공격 부대를 둘로 나누어 동쪽과 서쪽에서 각기 공격을 하였다. 우선 도종을 시켜 성 동남쪽 모퉁이에 토산을 쌓게 하였다. 토산은 단순히 흙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쌓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또 나무를 쌓고 흙을 덮는 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토산을 쌓은 이유는 성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공격하기 위함인데, 이에 안시성에서는 기존 성벽을 더 높이 증설하여 맞섰다.

   이세적은 성의 서쪽 공략을 맡았다. 그는 요동성을 공격할 때처럼 공성기를 적극 활용하였다. 하지만 안시성민들은 공성기에 인해 성루와 치가 무너질 때마다 그 자리에 바로 목책을 세우며 저항을 하였다. 안시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전투는 지지부진하게 2달을 끌게 되었다.

  한편 도종이 쌓아 나가던 토성은 점점 성벽에 근접하게 되고, 어느 순간 성을 밀어내며 무너져 버렸다. 안시성 싸움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이었다. 토산을 통해 무너진 성벽으로 당군이 난입하면 안시성이 함락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당시 토성 위에 진을 치고 있어야 했던 도종의 부장 부복애가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이에 무너진 성벽으로 고구려군 수백 명이 몰려 나와 토산을 빼앗아 버렸다. 고구려군은 토산에 참호를 치고 방패를 둘러 아예 그곳을 요새화해 버렸다. 얼마 전까지 고구려군을 위협했던 적의 전진 요새가 이제는 든든한 안시성의 한쪽 성벽이 되어 버린 셈이다. 토성을 쌓는 데만 2달이라는 시간을 소모한 당태종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당연하다. 마땅히 지키고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 있었던 부복애는 목이 잘려 본보기로 장수들에게 돌려졌다. 도종은 부하 관리를 잘못한 탓에 맨발로 죽음을 비는 처지가 되었으나 다행히 그동안 쌓은 공이 많고 당태종과 인척 관계에 있었으므로 죽음만은 면할 수 있었다.

   당태종은 이후 사흘 동안 온 힘을 다하여 안시성을 공략해 보았지만, 토성까지 빼앗긴 마당에 가능할 리 만무했다. 개전 이후 파죽지세였던 당나라 대군은 안시성에 발이 묶였고 마침내 추운 요동의 겨울이 찾아왔다. 찬바람이 부는 와중에 언제 함락될지 알 수 없는 적의 성 앞에서의 야영은 고통스러웠고, 양식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말에게 먹일 풀은 마르고, 물은 얼어 버렸다. 물러날 때가 된 것이다. 

  결국 당태종은 철군을 명하였다. 안시성주는 성 위에서 철군하는 적에게 예를 표하였다고 하며, 당태종은 비단 100필을 보내 안시성주를 치하했다고 전한다. 다른 전승에서는 퇴각하느라 허둥거리는 당태종의 뒤를 안시성주가 공격하여 당태종의 눈을 화살로 꿰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통쾌한 느낌을 주는 뒷쪽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듯하지만, 개인적으로 몇 달 동안 칼을 맞대고 생사를 겨루던 적에게 마지막 순간에 예를 표하는 안시성주의 모습이 더 멋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5. 당군의 퇴각과 뒷 이야기
 

  이미 추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퇴군의 길은 굉장히 고생스러웠던 것 같다. 당태종은 이세적과 도종에게 보병과 기병 4만을 주어 후군으로 삼고 혹시 있을 고구려군의 공격을 대비케 하였고, 진창이 되어 버린 요택에서는 장손무기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있도록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했다. 이때 당태종 스스로도 직접 일을 도와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요택을 건너 발착수에 이르렀을 때는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당태종의 원정 결과 고구려의 현도성, 횡산성, 개모성, 마미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 협곡성, 은산성, 후황성 등이 함락되었고, 특히 거성이었던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의 주민은 7만 명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고연수는 항복한 이후 근심만 하다가 죽었고, 고혜진은 살아서 장안까지 갔다고 한다. 《자치통감》은 이 전쟁에서 고구려군 사망자는 4만 여 명, 당의 사망자는 2,000여 명이며 당군이 끌고 갔던 말은 10에 7~8이 죽었다고 한다. 당군의 사망자수가 생각보다 적어서 의외이기는 한데, 《자치통감》 기록의 정확성을 의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피해 정도를 따지면 고구려가 훨씬 컸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고구려는 상당한 수의 병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요동 지역 주요 거점들을 유린당하였고, 그동안 비축해 놓았던 군량과 군수물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게다가 1년 정도 지속된 전쟁 탓에 요동 지역에서의 생산 활동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태종은 안시성 싸움 후 4년 정도 뒤인 649년 세상을 떠난다. 한국에서는 당태종이 죽으며 태자에게 ‘고구려를 치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당태종의 이 발언에 대해 ‘고구려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이니 절대 건드리지 말아라’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일방적인 해석이다. 왜냐하면 당태종은 645년의 대규모 원정 이후에도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친정 실패 이후 소규모 국지전의 형태로 계속 요동 지역을 공략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국력을 지속적으로 갉아 먹는 전략이었고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당군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요동 지역은 전후 복구를 하지 못한 채 피폐해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언제 전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인지라 인구는 줄어들고 수확도 감소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국가 재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당태종은 다음 번 정벌에서는 반드시 적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648년에는 장손무기와 함께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한 전면적인 고구려 재정벌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지시로 전투선의 건조를 명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천수를 다하여 죽은 것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것은 뒤를 이을 당고종이 유약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고종이 몸도 약하고 성격이 여려서 자기처럼 전쟁을 수행할 타입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당태종이 당고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이유도 다른 형제들과 싸우면서 죽고 죽이는 참혹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당고종은 결국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고구려와의 전쟁을 수행하였고, 심지어 아버지도 성공하지 못하였던 고구려 정벌에 성공한다. 이는 당태종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당태종은 미처 몰랐지만 우리는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하나 있다. 당고종의 아내가 다른 사람 아닌 측천무후라는 점 말이다.

  당고종 때의 전쟁은 주로 압록강~평양 일대에서 펼쳐진다. 이는 고구려의 요하 방어선이 당태종 대에 이미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시성 싸움으로 대표되는 당태종과의 전쟁을 당시 고구려의 위상과 국력을 보여 주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고구려는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여 피를 토하며 본격적으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