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사관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런 대답이 나올 확률이 높을 것 같다.
'우리 민족의 모든 역사가 반도에서 일어났다고 왜곡한 일제 식민사관'
하지만 틀렸다. 엄밀히 말해 위의 내용은 '반도사관'의 학술적인 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부 국수적 성향의 재야사학자들이 퍼트린 이상한 개념일 뿐이다. 진짜 반도사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반도에 위치해 지리적으로 대륙세력에도, 해양세력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항상 외세의 침입과 간섭을 당하는 수동성과 열등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위의 내용이야말로 일제시기에 식민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주창되었던 반도사관의 실체다. '반도사관'이라는 용어, 나름대로 학자들에 의해 개념화된 학술적 용어다. 그런데 앞의 것과 똑같은 소리가 아니냐구? 아니다. 전혀 다르다.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에게 있어서 조선의 역사가 반도의 역사였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 그 자체였다. 굳이 왜곡을 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들이 실제로 점유하고 있는 영역이 정확히 한반도였으니까.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기 위해 학문을 했던 정치성 강한 어용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집중했던 것은 지리적 결정론에 의거해 반도의 열등성을나타냄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 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반도사관이다.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만들어낸 반도사관에 대한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은 반도사관의 근거가 되는 지리적 결정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반도의 역사를 영위했던 로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반도의 역사가 반드시 수동성을 가진다는 전제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재야사학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퍼트린 지리적 결정론을 곧이 곧대로 수용해 버린다. '맞다. 반도의 역사는 수동의 역사이며 창피스러운 역사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사람들의 사고는 황당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우리의 역사가 결코 반도의 역사가 아니라고 우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갑자기 중국 대륙이 한민족의 무대가 되어 버린다. 더 심한 이들은 중앙 아시아에까지 한민족의 시원을 갖다 붙이고 세계 문명의 기원이 한민족에게 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병적인 강박관념이다.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의 지리적 결정론에 부여한 과도한 권위가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반도의 역사도 대륙의 역사만큼 가치 있는 역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죽어라고 반도를 멸시하고 폄하하며 반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가장 큰 문제는 영광된 고대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때 발생한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대륙에 있는가? 아니다. 반도에 있다. 그나마 그것도 반으로 쪼개져 있다. '대륙 사관론자'라고 자칭하는 일부 재야사학자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한국은 최악의 상황이다. 반도에 붙어 있는 코딱지만한 나라,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결국 그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 대는,'우리의 위대한 역사는 대륙에서 전개되었다. 어디 반도 구석탱이에다 처박으려 드느냐?'는 주장은 현실에 대한 깊은 열등감과 좌절감에 기반한 것이다.
그 결과 자칭 역사 공부를 한다는 자들이 하는 짓이 온갖 고서들을 펼쳐 놓고 한국과 중국의 비슷한 지명을 찾아내어 대응시키는 땅따먹기를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역사는 왕년에 우리 땅이 얼마나 넓었고, 우리 민족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설명해줘야만 하는 국정홍보처의 광고 같은 것에 불과하다. 인류가 살아온 궤적에 대한 진지한 접근, 그로 인한 인간에 대한 이해, 이런 건 안중에도 없다. 단지 유치원생 수준의 땅따먹기가 전부다.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장한 반도사관은 이 땅에서 학문적으로 축출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반도사관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존재하고 있다. 스스로를 대륙사관론자라고 소개하는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식민주의 사학자들의 가르침대로 반도의 역사를 '부끄러움의 역사'로 매도하며 바다 건너 대륙에 대한 짝사랑을 이어 가고 있다. 불쌍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