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기랑의 백지 채우기
  • 기랑의 백지 채우기
  • 기랑의 백지 채우기
역사 노트

연개소문은 한국인의 조상인가?

by kirang 2009. 6. 18.

'연개소문은 과연 한국인의 조상인가?'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 문제, 의외의 면을 가지고 있다.

 

  연개소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남생, 남건, 남산이 그들이다. 연개소문은 666년 사망할 당시 뭔가 예감한 바가 있었는지 세 아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사후에도 싸우지 말고 의좋게 지낼 것을 두번, 세번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남생과 남건, 남산 형제는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였고, 남건의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상실한 남생은 급기야 당나라로 투항, 고구려 공격의 선봉이 되어버렸다.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 왕족과 이름난 귀족들은 대부분 당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의 아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남생은 고구려 정벌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게 상당히 높은 관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남산의 경우 남생처럼 화려한 길을 걷지는 못했지만, 한직일지언정 벼슬자리를 얻고 나름대로 풍족한 삶을 살았다. 평양성이 함락되던 순간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던 남건만이 지방으로 유배되어 한 많은 인생을 마쳤다.

 

  문제는 이들이 모두 중국에 귀화하여 중국인으로 살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아들, 손자 등도 당연히 중국인으로 살며 당에 벼슬하였고, 그 자손들 역시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연개소문의 직계 핏줄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점은 연개소문의 생물학적 유전자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들에게 이어졌다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국 고대사의 대표적인 인물의 핏줄이 정작 한국에서는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그런데 이는 연개소문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구려 왕실을 비롯해 당대의 고구려 명문 귀족들이 상당수가 같은 길을 걸었다.

 

  실상이 그렇다 하더라도 연개소문을 한국사의 체계 안에서 논하고 서술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우리 선조'의 개념이 혈연적 관계를 완전 배제하는 것이 아닌만큼 여러모로 생각해볼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중국인의 선조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한다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과 후대인들의 '역사 인식', '역사 계승성'은 모순되고 괴리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연개소문의 가계 문제는 중국 동북공정 문제와 연계해 생각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