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절대적 평등[은] 교육에 대한 개인적 지출을 모두 금지한다. 모든 부모들의 소득이 같을 경우에도, 그렇다. 그러나 공식 교육은 아이들의 '교육'에서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학습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가정 활동들은 평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비슷한 부모를 가진 것은 아니다. 부모 가운데 한쪽이 없거나 둘다 없는 아이도 있다. 그런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우들은 형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형들이 불리하지 않도록 형제들을 갈라 놓아야 할 것인가? 형이 없는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정당화될 수 없는' 이익을 얻을 것이므로, 책을 많이 사주거나 박물관이나 해외 여행에 데리고 가는 부모들은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문제가 없는 해결책은 아이들을,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떼어내서 국가가 기르고 가르치는 것이다. 권위주의 사상의 원조인 플라톤이 주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시도한 사회들도 있으니, 고대의 스파르타와 현대의 몇몇 공산주의 사회들은 대표적 예들이다. 그러나 문제가 말끔히 풀린 것은 아니다. 아이들 사이의 타고난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타고난 재능과 품성과 용모가 사회생활에서 중요하다면, 지능이 낮고 얼굴이 덜 예쁜 아이들은, 태어날 때, 이미 평등한 기회를 잃은 셈 아닌가? '물려 받은' 재산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물려 받은' 재능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똑똑하고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 자신들의 재능으로부터 얻을 이점을 상쇄할만큼 교육을 덜 받아야, 평등의 이상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수준의 아이들에 맞추어야 하는가? 평균적 재능을 가진 아이들에? 아니면 가장 재능이 낮은 아이들에?"
복거일, '사회적 선택과 개인의 몫', "현실과 지향", 348쪽-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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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문제제기는 핵심을 찌르는 면이 있다. 그의 말대로 교육기회의 절대적 평균은 환상이다. 부모가 가진 재산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을 제거하더라도 결국은 타고난 재능의 차이라는 불평등이 남게 된다. 교육기회의 절대적 평등이라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럼 복거일의 해결법은 무엇인가. 어차피 교육기회의 절대적 평등이란 허상에 불과한 것이고 때로는 악하기까지 한 것이니, 국가는 전혀 간섭하지 말고 완전히 자유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 내가 평소 가지고 있던 이미지의 '자유주의자 복거일'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 같지만, 위의 인용문에서는 교육 평등 작업의 극단적인 문제점만 나열되어 있을 뿐 대안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일단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서 복거일이 개개인의 경쟁력을 존중한 교육의 완전한 자유를 주장했다고 간주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다.
복거일은 국가가 모든 아이들을 데려다 공동으로 육아하는 플라톤의 방식을 획일적 교육의 사례로 들었지만, 사실 플라톤은 개인의 재능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사회적 역할 분담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육아 과정에서 아이들의 재능을 세심하게 구별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철인이나 수호자들로 선별해 키우자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복거일이 든 예는 매우 극단적인 것이므로 우리가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교육 및 육아 시스템을 취할 이유는 없다.
나 역시 바람직한 사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건전한 경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건전한 경쟁과 그 결과에 따른 적절한 차별적 보상은 자본주의의 가장 큰 미덕이자 핵심 윤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경쟁과 보상의 공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조선 시대 과거 제도에서는 양반 계급 뿐 아니라 평민도 시험을 치르는 것이 가능했다. 신분이 천인이 아니라면 대대로 농부로 살아왔던 사람도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는 게 원칙상으로는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일개 평민이 양반들을 제치고 과거에 급제한 경우는 없었다. 땅 파서 먹고 살기 바쁜데 여유 있게 공자왈 맹자왈 운운하며 경서 공부 따위를 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모두에게 과거의 문이 열려 있다'는 명제는 참이지만, 이는 기만으로 덧칠된 참이다. 학문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일부 양반층에게 독점되었고, 수많은 평민 출신의 '재능'들은 발견되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현재 우리는 명목상 신분제가 철폐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민주화된 현대 사회가 조선 시대에 비해 훨씬 정의롭고 구성원들의 재능을 이끌어내기에 효율적인 체제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 공정성을 제약하는 요소들이 있다. 세습을 기반으로 한 부의 불평등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에 '모두에게 과거 급제의 문이 열려 있다'는 기만이 존재하였듯이, 현대 사회에는 '모든 계층에 성공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기만이 존재한다.
나는 부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많은 사회적 공헌을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자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는 촉매제로서 부의 불평등이 가지는 나름의 순기능을 인정한다. 그러나 일단 형성된 부는 공정하고 건전한 경쟁에 저항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부를 쌓은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공정한 경쟁'보다는 '자신이 승리하는 경쟁'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이들은 '자유 경쟁'이라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경쟁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는 말에 다름아니다. 개개인이 지닌 재능과 성실함에 기반한 경쟁보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부의 크기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는 성격의 경쟁이라면 이는 이미 경쟁의 건강성을 상실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부는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공정한 경쟁의 장을 구성원들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부의 불평등에서 오는 차이를 없앤다 하더라도 결국 재능의 불평등은 남는 문제점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사회적 부와 달리 재능은 개인에게 부여된 천부적 자산이며 각자의 인격에서 분리되거나 양보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사회적 부와 개인의 인격은 분리될 수 있으나, 재능은 각자의 인격이 지닌 고유한 개성이다. 따라서 양자는 애초에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모든 인격체가 각자의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지닌 재능의 불평등은 인정되어야 한다.
부의 편중에 따른 외부적 환경의 불평등과 개인이 지닌 재능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이 공존한다면, 국가는 전자의 영향력을 줄이고 후자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통해 공동체 전체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제고해야 한다. 사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앉는 이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것인 재능을 가진 이들인 편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안전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가장 이득이 될 수 있는 수준의 개입과 조정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꾸준히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교육의 완전한 평등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이 교육의 완전한 자유 경쟁 체제를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완벽한 정의나 완벽한 선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고 해서 정의와 선을 추구하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이다.
교육의 평등은 외부적 요인이 아닌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 가치와 재능을 이끌어내는 한편 그 재능에 대한 공정하고 선명한 판별을 통해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한 계층의 연속성과 경직성을 완화시키고 사회의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획일적인 교육으로 인한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