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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드라마 "환상의 커플"

by kirang 2009.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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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환상의 커플"의 타이틀
 

  “환상의 커플”은 2006년 10월 14일부터 12월 3일까지 MBC에서 방영한 16부작 주말 미니시리즈이다. 같은 시간대에 시청률 경쟁을 했던 타방송 드라마는 KBS의 “대조영”, SBS의 “연개소문”이었다. “환상의 커플”을 제외하고는 모두 해당 방송사에서 상당한 자본을 투입하고 공을 들인 대하 사극들이다. “환상의 커플”의 규모가 같은 시간대 타 방송사의 드라마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는 점, 캐스팅에 소위 잘 나가는 스타급 배우가 전혀 없었다는 점, 이전에 MBC에서 방영한 주말 미니시리즈의 시청률이 20%를 넘은 사례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방영 당시 MBC에서 “환상의 커플”에 기대한 역할이 땜방용 ‘총알받이’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낱 소모품으로 여겼던 이 총알받이는 예상 외의 대박을 쳤다.


  시청률만으로 보면 대박이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환상의 커플의 시청률은 마지막 회만 20%를 넘었을 뿐, 방영중에는 줄곳 10%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환상의 커플”이 보여준 반향은 ‘존재감 없는 10%대 드라마’라고 보기 어렵다. 인터넷에서는 관련 기사가 수시로 업데이트 되었고 패러디 사진도 많이 돌아다녔다. 덕분에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이러한 정보들을 접하고 ‘꼬라지들 하고는’ 같은 유행어를 내뱉게 되었다.  “환상의 커플”의 주시청자가 10대와 20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하사극을 선호하는 아버지들에게 거실 TV의 채널 선택권을 빼앗긴 이들이 속칭 ‘어둠의 경로’라고 불리는 인터넷 다운로드를 통해 “환상의 커플”을 즐겼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을까.


  “환상의 커플”의 기본 설정은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니다. 가난한 하층 계급의 남자 주인공이 도도하고 인간성 안 좋은 부잣집 여자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을 악용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내용이니까. 더구나 그 여자가 ‘고맙게도’ 결국엔 자기에게 사기를 친 남자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하니, 정색을 하고 따지면 그저그런 남성 환타지라고 분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결코 마초적이거나 불쾌한 드라마가 아니다. 반대로 "환상의 커플“을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유쾌함과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환상의 커플”이 리얼리티가 거의 없는 드라마라는 점이다. 현실에서 장철수가 한 행동은 파렴치한 범죄 행위이지만, 온갖 과장과 우스개가 난무하는 이 드라마의 만화적 세계에서는 큰 흉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제작진은 장철수가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된 동기를 비교적 공을 들여서 마련해 주었다. 장철수는 조안나와의 첫 만남에서 비오는 날 삽으로 처절하게 두드려 맞았을 뿐 아니라 피처럼 아끼는 돈까지 강탈당한다(빗속에서 조안나가 삽으로 장철수를 내리치는 슬로우모션 씬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다). 조안나의 차 창문에 목이 낀 채 끌려가는가 하면, 자기 집 개를 도둑맞기도 하고, 요트에서 밀려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이때 빠진 연장들을 줍기 위해 잠수를 하다가 익사할 뻔 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소 가학적이면서도 웃느라 배를 잡게 만드는 상황들이 정신없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다음에 만날 땐 조심하라.”며 큰소리를 치지만 항상 된통 당하기만 하는 장철수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한편, 그가 조안나에게 복수심을 갖게 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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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으로 맞기 직전 경악하는 장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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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수를 연쇄살인범으로 오해하고 삽으로 후려치는 조안나

   여기에 조안나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강한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앞 서 말했듯 장철수는 수차례 복수하겠노라고 외치며 기세등등하게 조안나에게 달려들었지만, 매번 카운터 펀치를 맞으며 당하기만 했다. 비록 조안나가 기억을 잃고 나상실이 되었지만, 우린 이 사람이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장철수가 나상실의 애인을 사칭하며 집으로 데려갈 때에도, 나상실을 걱정하기 보다는 복수에 나선 장철수가 나상실에게 또 어떻게 당할지 속편하게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장철수가 나상실과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시기는 드라마를 통틀어서 나상실을 자신의 홈 그라운드에 데려온 첫 날 밤 뿐이다. 기억을 잃은 데다 낯선 환경에 내던져진 나상실은 절망에 빠지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비로소 수많은 팬들을 사로잡는 그의 대활약이 펼쳐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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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수와 조안나의 대결구도

  싸움의 주도권은 언제나 나상실이 쥐고 있다. “장철수, 이건 뭐야?”, “기억 안 나.” 라는 무기로 무장한 나상실은 끊임없이 사고를 쳐댄다. 잃어버린 돈의 본전을 뽑으려 했던 장철수는 본전은 커녕 매번 비명을 지르며 나상실의 뒷치닥거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멀리는 “아기공룡 둘리”, 가깝게는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그런 구도가 만들어내는 유쾌함을 즐긴 바 있다. 실제 나상실이라는 캐릭터는 프란체스카라는 캐릭터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고압적이고 무뚝뚝한 말투와 얹혀사는 주제에 집주인에 한없이 뻔뻔한 태도, 일상 생활에 대한 무지와 엉뚱함 등은 나상실과 프란체스카의 유사한 점이다. 나상실은 여기에 어린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과 시련을 이겨내는 씩씩함을 더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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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나였던 기억을 잃은 나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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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와 강자

  이처럼 과장된 스토리와 전복적인 캐릭터들의 역관계가 자칫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본 설정의 위험성을 말끔하게 해소해 준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나쁜 의도를 연상하기엔 지나치게 선량하다. 주인공들을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등장 인물들은 대부분 착한 사람들이다. 주무대인 작은 바닷가 마을의 풍광과 그곳에서의 일상 또한 따뜻하고 평화롭게 묘사된다. 예를 들어 밝고 명랑한 BGM이 깔린 가운데 나상실이 장철수의 조카들을 데리고 자장면을 사 먹으러 타박 타박 걸어가는 장면 같은 경우는 저절로 입에 미소가 지어지는 예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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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을 사 먹으러 가는 나상실과 장철수의 세 조카들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빌리와 공실장의 경우도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건 마찬가지이다. 빌리는 나약하고 겁이 많기는 하지만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다. 공실장은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며 빌리의 모사 노릇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어수룩한 순정파이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꾸미는 모의들은 똑부러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여 귀여운 맛이 있다. 덧붙이자면 빌리 역을 맡은 김성민은 드라마에서 가장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이기도 하다. 만화적이고 코믹한 초중반부는 물론 후반부의 정통 멜로까지 훌륭하게 소화하며 드라마의 중심을 잘 잡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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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 금붕어인 솔로몬과 함께 음악을 즐기고 있는 빌리

   좌충우돌 정신없이 사건사고가 벌어지는 초중반을 지나면서 점점 장철수와 나상실의 로맨스 비중이 커지게 된다. 이 은근한 로맨스의 진행 또한 “환상의 커플”이 가진 큰 재미이다. 모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주인공들은 쑥스러워 죽으려고’ 한다. 애정 표현은 시종일관 우회적이며 툴툴대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식으로 표현된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 못 하고 허둥대면서도 서투르나마 조금씩 가까워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흐뭇한 구경거리이다. 여기에 이들을 바라보면서 쓸쓸함을 느끼는 빌리의 어두운 표정들이 간간히 등장하며 가볍게만 진행될 수 있는 로맨스에 균형감을 실어 준다. 나상실이 그토록 원했던 기억의 회복은 사실 비극의 시작이라는 식이다.   


  “환상의 커플”은 성공적인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실패한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4명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인 오유경의 캐릭터 문제이다. 오유경은 “환상의 커플”을 통틀어 가장 현실적인 인물이면서도 가장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드라마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주인공들인 나상실, 장철수, 빌리가 정신없이 몸을 날려가며 코믹 연기를 펼치고, 또 비극에 휘말려 눈물바다를 만드는 와중에도 오유경은 특별히 하는 것이 없다. 시청자를 웃기지도, 울리지도 못하고 철저하게 방관자의 위치에 있다. 유일한 역할은 나상실과 장철수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인데, 이마저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캔디”에 나오는 이라이저처럼 아예 독한 역으로 나왔으면 제법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주도하거나 강한 인상을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가는 어쩌면 드라마 전반에 흐르는 ‘착한 사람들 이야기’ 컨셉을 흐트러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오유경은 드라마의 흐름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착실히 수행했지만, 개성 있는 형형색색의 캐릭터들이 몰려 있는 “환상의 커플”에서 유일하게 회색빛이 도는 불운한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또 하나의 실패는 촬영 일정 조절의 실패다. 절대적인 작업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후반부로 갈수록 눈에 보일만큼 편집이 산만해졌다. 중심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감정 흐름의 일관성도 흐트러지고, 비극으로 치닫는 행동의 설득력도 다소 약하다. 마지막회인 16회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감독이 왜 OK사인을 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어색한 연기들이 그대로 방영되었고, “눈 때문에 그런지 길이 막힌다.”는 대사가 무색하게 오는둥 마는둥 하는 눈, 텅텅 빈 도로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기도 하였다. 어지간한 실수라면 애정 때문에라도 그냥 넘어갔을 열혈팬들조차 불만을 터트릴 정도였으니 드라마의 완성도 차원에서 크게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인터넷에서의 뜨거운 반응을 의식해서인지 대사에 자장면 운운하는 것을 다소 남발한 점, 나상실이 고스톱을 배우는 씬처럼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여러 번 써먹은 낡은 농담 등은 지적받을 부분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사실 크게 나무랄 부분은 아니다. 모든 농담이 성공적일 수는 없고 그런 자잘한 실패를 상쇄시킬만큼 큰 웃음을 이미 여러 차례 성공하였으니까.

 

  “환상의 커플”은 캐릭터의 개성을 극대화시킨 재미있는 드라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웃음과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은 아마 상당히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