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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by kirang 200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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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에 개봉한 윤종빈 감독의 데뷔작이자 대학 졸업작품이다. 하정우와 서장원이 주연을 맡았다.


  예전에 MBC에서 “막상막하”라는 제목의 병영 드라마를 한 적이 있다. 주인공은 성유리였고 이훈, 서경석, 지상렬 등이 출연하였다. 드라마는 국방부의 협조 아래 실제 군부대를 배경으로 촬영되었는데, 성유리의 연기력에 관한 논란도 있었지만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성공한 드라마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시청한 대부분의 예비역-현역들은 아마도 성유리의 얼굴이 참 예쁘다는 것 외에 또 하나의 느낌을 공유했을 것이다. 바로 현실감 결여라는 점.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찍은 공중파 방송용 드라마답게 “막상막하”는 시종일관 군대를 긍정적으로 그려냈다. 시나리오 상의 갈등 관계는 군대 구성원들 간 개인적 오해에서 불거진 예외적 현상일 뿐이다. 그나마 이러한 갈등조차 주인공의 적극적이고 씩씩한 도전 정신과 전우애를 통해 말끔하게 극복된다. 참으로 건전하고 아름다운 국방부 홍보 드라마였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그런 점에서 “막상막하”류의 국방부 홍보용 드라마와 뚜렷하게 대비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국방부 홍보용 영화에서 결코 내보이지 않는 군생활의 어둡고 침침한 영역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밤이면 고참들의 집합 호출이 떨어지고 조폭 사회에서나 오고갈 욕설과 물리적 폭력이 자행된다. 이등병 때 고참들의 폭력에 이를 갈며 나는 결코 저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이들도 정작 고참이 되어서는 ‘이제야 옛날 고참들이 왜 그랬는지 알겠다. 부대가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며 판에 박힌 듯한 모습을 보인다. 사회에서는 다정한 애인이자, 친절한 학교 선배, 싹싹한 후배이기도 할 그들이 군대 내에서는 얼마든지 싸늘한 표정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논픽션이다.


  그들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일종의 생존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군대 내 계급 사회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글과 같다. 같은 부대 내 병사들 간에는 입대 날짜를 통해 월 단위, 혹은 주 단위로 끊어지는 계급 구조가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계급에 따른 권리의 영역이 세세하게 분배되어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파워 게임이 벌어진다. 자칫 빈틈을 보였다가는 윗 계급에게 터지고 아랫 계급에게 치이는 ‘꼬인 군생활’이 펼쳐질 수도 있다. 그 공포감이 그들을 더욱 잔인하게 만든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이러한 군대 내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두 명이다. 유태정과 이승영. 두 사람은 중학교 동창으로 유태정은 병장, 이승영은 이등병으로 같은 부대에서 재회하게 된다. 유태정은 너무도 일반적인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군대 시스템에 의문 따위를 가지지 않는다. 그는 ‘주어진’ 시스템에 스스로를 맞추어 가며 이 기괴한 조직에 효과적으로 적응하였다. 군기 반장의 역할을 맡아 때로는 후임병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며 고참들에게는 능력있다, 군생활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무탈한 군생활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중학교 친구인 이승영의 등장부터이다. 이승영은 유태정과 달리 섬세한 심성의 소유자인데다 폭력이 난무하는 군대의 시스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유태정은 그런 친구의 모습을 걱정하며 여러 모로 감싸주기도 하지만, 그건 이승영이 사회에서의 친구이기 때문에 행해지는 예외적 모습일 뿐 다른 후임병들에게 유태정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이다. 이승영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번번히 도와주는 유태정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지만, 그런 유태정도 결국 고참과 졸병간의 권력 문제가 걸려 있는 문제에 직면하자 모든 병사들이 모인 앞에서 친구인 이승영을 구타하게 된다. 유태정이 친구에게 구타를 가하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부대의 질서는 결국 그 자신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유태정이 제대를 한 후 보호막이 완전히 사라진 이승영 역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라면이 먹고 싶다는 후임병을 위해 한밤 중에 라면을 끓여주고, 물통을 대신 들어주기도 하던 그였지만, 자신이 고참이 되면 모든 것을 바꿔버리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그조차도 결국은 후임병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당사자가 되고 만다. 


  한국의 예비역들에게 군대는 어떤 존재인가. 누구보다도 ‘표준적이고 모범적인’ 군생활을 경험한, 예비역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유태정은 제대한 이후 ‘군복만 봐도 토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나 실제로 그에게 군대는 끊임없는 무용담을 끄집어낼 수 있는 추억의 공간이다. 군대에서 2년 이상을 버텨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쟁에서 승리한 셈이다. 그러니 술만 먹으면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 예비역들의 심리는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살벌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자가 무용담을 자랑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그들은 생존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걸고 남들에게 짓밟히고 또 짓밟기도 하였기에 그 과정에서 수단화된 폭력에 큰 고민없이 면죄부를 부여한다. 그들은 그것이 필요악이었으며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폭력 옹호의 이데올로기는 때로 부대를 위하여, 조직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라는 명분으로 치장되곤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표준적인 군생활을 영위한 예비역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들은 이 영화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군대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을 반성할까. 아니면 조직을 위해 폭력은 필요악이라는 생각을 고수할까. 혹 그들에게 이 영화는 술자리에서 수도 없이 들먹여지는 ‘그 때 그 시절’ 무용담의 필름 버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과연 이 영화는 현실에서 당사자들의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 덧붙임 : 이승영의 후임으로 등장한 어리버리한 병사를 연기한 사람이 윤종빈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