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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과 잡담

비평준화 정책에 대한 단상

by kirang 2009. 6. 17.

  이명박이 지난 대선 공약으로 발표한 교육정책의 내용은 그동안 교육부가 일관되게 추진했던 3불 정책과 비평준화 정책을 사실상 무너뜨리겠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비평준화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빈부 격차로 인한 교육 기회의 불평등과 그로 인해 고착화 되는 계급 구조의 원인은 죄다 (좌파적인) 평준화 정책 때문이며 평준화 정책이 없어지면 가난한 집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생기고 계급 순환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과연 그러한지 한번 따져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사교육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사교육 시장이 지나칠 정도로 일상화·비대화하였고, 그로 인해 학부모들이 비용 면에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2. 부유층이 우월한 자금력을 앞세워 질 높은 사교육을 통해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이로 인해 부유층 자제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높아진다. 가난한 집 자제들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부유층에게 상대적인 기회를 빼앗기며, 결국 계급이 세습된다.

  비평준화 정책을 쓰면 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과연 그럴까. 우선 첫 번째 문제, 전국 고교가 비평준화가 되면 정말 사교육 시장이 축소될까?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사교육 이상의 질 높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우수한 고등학교가 생기면 학부모들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공교육에 신뢰를 가지게 되고 자연 사교육이 없어질 거라는(혹은 축소될 거라는) 이야기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명문대를 많이 보내는 명문고에는 지원자가 몰린다. 당연 들어가기 위해서 경쟁이 생긴다. 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중학생들은 기를 쓰고 공부를 해야 한다. 어떻게? 혼자서? 교과서 중심으로 예습 복습 잘해서?  결론은 '닥치고 다시 사교육'이다. 이건 최상위권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준화라는 틀이 깨어지면 각 지역마다 고등학교들이 일렬로 서열화되고 고등학교 교복은 그 학생의 학업 능력과 신분을 노출하는 지표가 된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서열의 고등학교를 들어가려는 중학생들의 몸부림은 필연적으로 모든 학업 수준의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모는 결과로 이어진다. 비평준화가 된다고 해서 학부모들의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명문고를 들어가기 위해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사교육 시장은 더욱 팽창하고 학부모 및 학생들의 고통은 가중된다고 보는 게 옳다.

  두번째 문제로 넘어가 보자. 비평준화가 되면 정말 계급의 세습이 완화되고 가난한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생길까.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질 높은 사교육의 혜택을 못 받은 가난한 집 자제들이 명문대에 진학하는 비율이 날이 갈수록 떨어진다는 데 있었다. 비평준화 주장하는 이들 이야기는 중학교 때 공부 잘한 애들을 명문고로 모아 수준 높은 학습을 시키면 딱히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고,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앞에서 이미 비평준화가 되면 고입 사교육이 창궐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다시 제자리다. 계급 세습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저소득층이 명문대에 많이 들어 가야 하고, 그러려면 저소득층이 명문고에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명문고에 많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 많은 부모들의 도움을 얻어 사교육을 받는 게 유리하다. 이래서는 답이 안 나온다.

  비평준화 정책을 통해 변하는 건 사교육 시장이 더 팽창한다는 것,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도 증가한다는 것, 가난한 집 학생에게 유리해지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 부유한 집 학생에게는 여전히(혹은 지금보다 더) 유리하다는 것, 그리고 대학 서열 외에 고등학교 서열이라는 계급이 하나 더 생기고 고등학생들이 느끼는 입시교육의 고통이 중학생에게로까지 확장된다는 것뿐이다. 

  비평준화를 선호하는 이들은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 학생들의 수준이 하향평준화되었고, 이로 인해 교육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평준화 제도 하에서도 줄곳 국제 올림피아드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성적을 내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탁월한 엘리트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해 과학고와 외국어고 등의 특목고를 허용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평준화 정책 때문에 학생들 수준이 떨어지고 엘리트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경쟁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경쟁은 나름 선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의 큰 문제점은 경쟁의 부족이 아니라 '경쟁의 과잉'이다. 학생들은 성적 때문에 자살의 유혹을 느끼고, 입시를 치르기 위해 청소년 시기에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포기한 채 학교와 학원과 도서관에서 회색빛 삶을 살아야 한다. 현 시점에서 전면적인 비평준화 정책으로의 전환은 한국 교육의 병폐를 더욱 악화시킬 '독약처방'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