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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26년"

by kirang 2014. 8. 19.



2012년 개봉한 조근현 감독의 영화이다. 강풀의 웹툰 "23년"이 원작이다.

정치적 문제로 영화가 아주 힘들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평이 썩 좋지 않음에도 관람했는데, 예상대로 아쉬움이 많다.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분노의 대상인 '그 사람'의 존재를 제시하고, 그를 처단하려는 극중 인물들의 감정에 몰입케 하고자 한다. 하지만 극중 인물들에 대한 이해나 공감보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의 감정이 먼저 느껴지니 문제다. 영화는 관객들이 미처 감정을 쌓아 올리기도 전에 분노나 슬픔을 당위로서 제시하는데, 이게 상당히 몰입을 방해한다. 만약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마음 속에 어떤 동요를 느꼈다면 연출의 힘이라기보다 현실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인식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그 사람'은 이런 저런 대사를 장황하게 읊으며 관객의 분노를 유발하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친다. 대사 중 상당수는 그가 실제로 한 발언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중 대사들의 조합은 억지로 짜맞춘듯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그 사람'의 캐릭터는 너무 작위적이어서 거악이라기보다는 3류 영화에나 나오는 얄팍한 악당 정도로 보인다. 그럴 바에야 실루엣이나 뒷모습 위주로 노출하여 최대한 등장을 줄이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다.

편집이 뚝뚝 끊어지고 고민 없이 상황에 맞춰 적당히 삽입해 넣은 기계적이고 상투적인 대사들이 많다. 배우들은 열심히 하지만, 진짜 그 인물이라기보다 말 그대로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만 보인다. 이게 연기력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각본과 연출의 문제가 크다. 원작 만화의 설정을 변형시킨 부분이 꽤 있지만, 왜 바꿨는지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고, 바뀐 부분들이 썩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들지도 않은 것 같다.

안타깝게도 강풀의 만화를 영화로 옮긴 시도는 또 한 번 실패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지금껏 나온 5.18 관련 영화 중 내 마음에 드는 건 코미디 영화인 "스카우트" 뿐이다. 물론 "스카우트"도 약간의 문제는 있는 영화이지만, 그래도 고민의 깊이와 그것을 터트리는 방식이 월등하게 좋았다. 훨씬 직접적으로 문제의 대상을 바라보는 영화인 "26"년이 그 지점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