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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책 "모방범"

by kirang 2014. 8.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모방범"은 우리나라에서 영화화되기도 한 "화차"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이다. 전 3권이며 각 권의 분량은 500쪽에 달한다. 책 표지에는 추리 소설로 소개되고 있지만, 명석한 탐정이 등장하여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범인을 찾아내는 식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범인은 생각보다 일찍 정체를 드러내고, 이야기는 전지적 시점에서 그의 행적을 일일히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독자가 범인을 찾아내거나 기발한 트릭을 간파하기 위해 머리를 써야 할 일은 전혀 없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범죄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모방범"이 집중하는 것은 작가와 독자 간의 두뇌 게임이 아니라 범죄를 둘러싼 인간과 사회의 내면에 대한 관찰이다. 소아병적인 과시욕으로 가득한 범인의 가학성, 잔인한 범죄의 피해자로 내던져진 인물들의 좌절감, 가족이 살해당한 이들의 분노와 슬픔과 자괴감, 그리고 타자의 입장에서 범죄 이야기를 '소비'하는 미디어와 대중. 상당한 수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연쇄살인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입체적인 이야기를 구성한다. 긴 내용임에도 몰입감 있게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마무리는 다소 싱겁다.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이나 폭로되는 방식에서 기발하다는 감탄을 자아내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한 부분은 없다. 그게 딱히 흠이 되는 소설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르 문학에 대한 기대치라는 것이 있다보니 아쉬운 부분이다.

찜찜했던 것은 소설에서는 범인의 실패, 혹은 몰락이라는 식으로 마무리하고 있음에도, 과연 그러한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물론 범인이 가장 원했던 상황 좌절되었다. 하지만 죄가 드러나 감옥에 가는 것 정도로 그가 타격을 입을 것 같지는 않다.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에 등장하는 연쇄살인범 장경철의 경우처럼, 보통 사람과 괴물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불공정하다. 고통의 기준이 우리와는 다른 그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모방범"의 범인은 여전히 사건의 진상을 가장 실제와 가깝게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남의 피와 살이 튀는 이야기에 굶주린 대중과 미디어에게 그의 가치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아니, 악당으로 역할이 바뀌었을 뿐 화자로서의 가치는 오히려 상종가를 칠 터이다. 작가가 애써 눈감은 것과 달리 결국 승리자는 범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