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친구와 지하철을 탔는데 한 시각장애인이 바구니를 들고 우리 앞을 지나갔다. 마침 주머니에는 동전이 몇 개 있었다. 나는 고민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편으로 동전을 주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동정심의 크기가 더 컸기에 용기를 내어 동전을 바구니에 넣었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야, 저거 다 쇼야."
비웃는 듯한 친구의 말에 내 마음 속에 퍼지던 작은 뿌듯함은 민망함과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느끼고 선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의 결심과 용기가 필요하다.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선행을 포기한다. 선행을 외면한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아무래도 조금은 불편하고 거북할 것이다. 배운 것과 실제 행동의 괴리로 인해 나름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택하는 방법은 타인이 한 선행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시각 장애인처럼 보이지만 사기꾼이다. 사기꾼에게 속아 돈을 주다니 어리석다. 아니, 사기꾼이라는 사회악을 도와 주었다는 점에서 그 행위는 오히려 나쁘다.'
이러한 합리화는 선행을 외면한 이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준다.
물론 내가 전철에서 만난 시각장애인은 정말로 사기꾼일 수 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선행을 결심하던 그 순간 확정된 진실은 없다. 더구나 선행의 금액이 매우 소액이어서 감수해야 할 비용이 미미하다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한 행동이 비웃음을 당하거나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선행을 위해 용기를 내지 않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비겁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비겁함을 가리기 위해 타인의 선행을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행위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비겁함에서 멈추지 않고 비열함으로 나아간다.
비겁함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용감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철저한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일정 부분 비겁한 존재들이고 소소한 이기심에 휘둘리는 이들이다. 차라리 이러한 자신의 한계와 비겁함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타인의 용기 있는 선행을 더욱더 칭찬하고, 경의를 표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비겁할 지언정 비열해지지는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