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일 TVN에서 방영하는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 프로에 한국사 강사인 설민석이 나왔다. 그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그중 조선시대 정치에 대한 설명 중 걸리는 부분이 있어 살펴보고자 한다.
http://tvcast.naver.com/v/910178
"어쩌다어른"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조선시대 정치판!
설민석은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일본에 파견했던 사신단이 돌아와 선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설명한다(위 링크된 동영상 부분). 서인이었던 황윤길이 일본이 쳐들어올 것 같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하자 동인이었던 김성일이 일본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설민석은 이후 동인들이 김성일과 따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동인들: "이봐, 정말 안 쳐들어오는 것 맞아?"
김성일 :"아니, 쳐들어올 것 같아"
동인들: "아니,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런데 왜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거짓 보고를 해?"
김성일: "아니, 그럼 서인이 쳐들어온다고 그러는데 같이 쳐들어 온다고 그래? 무조건 반대해야지."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설민석이 쉬운 내용 전달을 위하여 자기 나름대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명백히 기록이 있는 사실을 왜곡하여 전달하는 것은 곤란하다. 위 사건은 관련 기록이 꽤 남아 있는 편이기 때문에 내용 확인이 충분히 가능하다.
위 사건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내막을 전하는 이는 류성용이다. 류성용의 문집인 "서애선생문집"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임진년의 난리로 국사가 그르쳐졌으니 당시의 대신들은 정말 그 죄를 피할 길이 없으니, 구구하게 스스로 변명해 봤자 다만 허물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실정을 대략 한두 가지라도 진술하여 너희들이 알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초에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서 두 사람이 적의 정세를 말한 것은 서로 달랐다. 내가 하루는 친히 김성일을 만나 보고 묻기를,
“그대가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왜군이 실지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였더니, 김성일이 말하였다.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야 있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 같아 인심이 흉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뿐입니다.”
"서애선생문집" 제16권, 잡저(雜著), 임진년 일의 시말(始末)을 적어 아이들에게 보임
이 내용은 류성용이 쓴 "징비록"에도 실려 있다. 이러한 자료에 따르면 김성일은 서인들이 쳐들어온다고 했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였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저 인심이 흉흉해지는 것을 걱정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같은 동인인 류성룡의 증언이기 때문에 친한 사람을 감싸기 위해 변호를 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류성용뿐 아니라 이항복의 경우도 경연 자리에서 선조에게 비슷한 논지로 김성일을 변호한 적이 있다.
갑오년(1594, 선조 27) 2월 6일의 조강(朝講)에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응남(金應南)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성일이 영남에서 온 마음을 다한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추증하여야 합니다.”
하고, 옥당(玉堂)의 신하인 김우옹(金宇顒) 역시 아뢰기를,
“김성일은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의병을 수습하였으며, 온 마음을 다해 왜적을 막았습니다. 왜적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고 호남과 영남 지방이 보존된 것은 모두 김성일의 힘으로, 그의 공이 몹시 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다. 다만 김성일은 풍신수길(豐臣秀吉)에게 속임을 당하여 풍신수길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황윤길(黃允吉)은 두려워할 만하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이 도리어 식견이 있는 듯하다.”
하자, 김우옹과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김성일은 성품이 곧아서 왜인들이 공경하면서 꺼렸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이는 속임을 당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당시에 신이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김성일을 보고 일본의 일에 대해 물어보니, 김성일은 도리어 깊이 걱정하면서도 단지 ‘남방(南方)에는 방어하는 데 따른 여러 가지 일이 몹시 번거로운 탓에 민심이 소요하여 왜적이 이르기도 전에 먼저 무너지게 생겼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여서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학봉일고" 부록 제1권, 경연(經筵)에서의 주대(奏對)
이항복은 당색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굳이 분류하자면 서인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이 동인이었던 김성일을 변호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사람은 황윤길과 김성일 두 사람만이 아니다. 정사인 황윤길, 부사인 김성일 외에 종사관으로 간 허성(許筬)이 있었다. 그런데 허성은 선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황윤길과 김성일의 중간 정도 입장을 취하면서도 황윤길의 말을 보다 두둔하였던 것이다.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허성의 당색이 김성일과 같은 동인이라는 점이다. 즉, 동인인 허성이 서인인 황윤길을 두둔하였고, 서인인 이항복이 동인인 김성일을 변호하였다. 이를 보면 동서 양당의 싸움 때문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다른 의견을 제출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물론 두 사람이 상반된 의견을 제출한 이후 서인들은 황윤길 쪽의 의견을, 동인들은 김성일 쪽의 의견을 더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의견 제출 자체가 당색에 의한 것이다'라는 주장의 타당성이다). 경연 자리에서 선조가 신하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보아도 선조는 김성일이 식견이 부족해 일본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속아서' 돌아왔다고 비난을 하고 있을 뿐, 당파 싸움 때문에 거짓 보고를 하였다고 문제 삼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김성일은 왜 그런 보고를 한 것일까. 그는 당장 일본이 쳐들어올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떠는 분위기 자체를 못마땅해 하였던 듯하다. 물론 이는 그릇된 정세 판단이었다. 하지만 김성일이 당파 싸움에 눈이 어두워 일부러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저열한 품성을 가진 인물이라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김성일이 어떤 캐릭터를 가진 인물인지는 그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의 행보를 통해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조선에서는 황윤길, 김성일 등 20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거의 100년 만에 이루어진 사신 파견이었다. 따라서 의전 상 매끄럽지 못한 사건이 많이 있었다. 사신단이 대마도에 머물던 당시 대마도주인 종의지(宗義智)가 가마를 타고 조선 사신이 앉아 있는 대청 앞까지 이르는 등 예법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황윤길이나 허성은 오랑캐가 무슨 예법을 알겠냐면서 부드럽게 넘어가려 하였으나 김성일은 정색하며 단호한 태도를 취하였다. 김성일의 태도에 크게 당황한 일본 측은 가마꾼을 처형하는 등 조선 사신단에 깍듯하게 사죄의 뜻을 표하였는데, 이러한 양상이 대마도뿐 아니라 일본에 머무르는 기간 내내 이어졌다. 예를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에 포함된 참람되고 오만한 표현들에게 대해 김성일이 화를 내며 고칠 것을 요구하여 일부 자구를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김성일은 사신단이 조선 국왕을 대리하여 온 존재인만큼 강경하고 권위적인 태도를 보여 일본인들에게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황윤길은 인접국과 불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유연하게 행동하자는 입장이었다. 개인의 성격과 업무 수행의 기조 차이로 인해서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성일은 일본에 있는 동안 황윤길이 사사건건 일본의 눈치나 보는 비굴하고 기개가 없는 사람이라 여기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황윤길은 황윤길대로 원리원칙을 따지며 의전 하나하나를 문제 삼는 김성일이 피곤하고 갑갑했을 것이다). 이러한 못마땅한 감정이 귀국 이후 임금에게 보고를 할 때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사신단이 받아온 히데요시의 서신은 방약무인한 내용이었고,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위협 자체는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었다. 다만 일본의 실력에 대한 평가가 문제였다. 김성일은 일본의 국력이나 히데요시의 인물됨에 대해 얕잡아 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하찮은 오랑캐가 대국인 명나라를 치겠다는 발언 자체가 망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망상에 빠진 오랑캐의 공갈에 넘어가 조정과 나라 전체가 두려워하며 들썩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한편, 설사 일본이 쳐들어오더라도 준비를 잘하여 막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실제로 조선은 일반의 인식과 달리 임진왜란 전에 비교적 착실하게 전쟁 준비를 하였다. 지방의 성벽들을 수리 보수하는 한편, 이순신 같은 낮은 품계의 인물을 파격적으로 발탁하여 주요 보직에 임명하였다. 다만 임진왜란이 조선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미증유의 대규모 침공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김성일은 일본에 머무는 기간에 의전에 있어서 타협적이지 않고 깐깐한 모습을 보여 조선의 위상과 기개를 보여 주려 하였다. 하지만 외국의 실정을 최대한 정확히 수집하여 보고해야 하는 임무에는 실패하였고, 조선이 당면한 위험을 과소평가하였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단, 김성일의 잘못을 '당파 싸움'이라는 단순한 인식 틀로 규정하는 것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제시한 '당파성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조선인들이 당파를 지어 끝없이 싸움을 하는 한심하고 저열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당파성론을 주장하였다. 당색에 따른 차별과 다툼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통용되고 있는 문제의식이었기 때문에 식민주의 사학자들의 불순한 의도가 담긴 당파성론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졌다. 특히 임진왜란 직전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를 당쟁 때문으로 보는 시각은 나라가 전쟁에 휘말려 망하든 말든 당파 싸움에만 골몰하는 조선인들의 한심함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인 소재였기 때문에 더 널리 퍼진 감이 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반성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근거를 갖춘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순한 의도에 기반한 왜곡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