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신문보도에 따르면 그간 논란이 되었던 동북아역사지도는 결국 폐기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조.
경향신문 : 45억 들인 동북아역사지도, 최종 ‘불합격’…다시 ‘원점’으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282056005&code=960100)
연합뉴스 : 8년간 45억 들인 동북아역사지도 결국 폐기 결론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6/06/28/0901000000AKR20160628116051005.HTML)
폐기 명목은 지도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이 지도에 대해서는 과거 이덕일을 비롯한 사이비 역사가들이 극렬하게 비난을 한 바 있다. 핵심적인 근거는 고조선 수도와 낙랑군이 평양에 그려져 있다는 것과 독도가 안 그려져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황당하고 저열한 주장인지는 내 블로그에서 이미 수 차례 다룬 바 있다.
사이비 역사가들과 그들에게 부화뇌동하는 국회의원들의 횡포에 역사학자들이 반발하자 동북아역사재단 쪽에서 갑자기 '지도학적 완성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이 문제를 '역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학'의 문제라고 전환시켜 무마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동북아역사지도의 폐기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지 모른다.
나는 지리학이나 지도학에 대해 알지 못한다. 더구나 동북아역사지도 심사 과정에 있어서 '지도학'적으로 어떠한 지적들이 나왔는지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보도된 내용에 한정하여 내가 받은 인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우리나라 역사지도인데도 한반도가 지도 가장자리에 위치하거나, 독도를 표시하지 않는 등 지도학적으로 문제가 보완되지 않아 편찬에 부적합하다고 결론 내렸다”(경향신문)
구글지도로 본 한중일 통합 지도
현재의 동북아시아 세 나라를 한 장의 지도에 표현하려면 이처럼 한국이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물론 도법을 바꾸는 방법도 있으나, 한반도를 지도 중심에 위치시킨 상태에서 중국 전역을 표현하려면 전체 지형의 상당한 굴절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지적사항이었다면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한반도가 지도 한쪽에 치우쳐서 표시되었다는 이야기와 관련해 또 하나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연합뉴스에 실린 다음의 그림이다.
연합뉴스에 실린 문제의 동북아역사지도
연합신문 기사에는 위 지도 밑에 "한반도가 시계 방향으로 기운 채 지도 구석에 그려져 있다"라고 캡션이 붙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동북아역사지도 검토팀의 지적 사항이라면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지도에는 좌측 상단에 제목이 붙어 있다. '1920년대 일본의 행정구역'이 그것이다. 이 지도에서 일본이 중심에 그려져 있고 한반도가 구석에 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건 '일본 역사 지리'를 나타낸 지도이기 때문이다. 보도에 따르면 동북아역사지도의 전체 매수는 700매가 넘는다. 여기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의 시기별 역사 지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각 나라별 역사 지도는 당연히 그 나라를 중심에 놓고 표현하였을 것이므로, 한국의 역사를 나타낸 지도에서는 당연히 한반도가 중심에 그려져 있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일본이 중심에 그려진 지도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혹자는 지도 전체가 기울어져 있는 것이 이상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사선 형태로 형성되어 있는 일본 열도를 가로가 긴 지도의 판형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넣기 위해서라고 이해된다. 이 정도는 정보 전달의 중점을 어디에 두었는지에 따른 연출 상의 선택 문제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책인 "아틀라스 한국사"에는 다음과 같은 지도가 들어가 있다.
"아틀라스 한국사", 사계절, 2004, 88쪽.
이 지도에서도 한반도는 구석에 치우쳐 있고 또 기울어져 있다. 이 지도뿐 아니라 "아틀라스 한국사"에는 기울어진 형태의 한반도 지도가 굉장히 많이 실려 있다. 동북아역사지도의 폐기 이유에 따르면 "아틀라스 한국사"는 출간되어서는 안 되는 지도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지금껏 없었다. 따라서 "한반도가 지도 가장자리에 위치" 운운하는 지적 사항은 '지적을 위한 지적'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동북아역사지도 편찬과 관련해 실제로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건강하게 지적하고 교정하기에는 이미 이 문제가 학문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의 좌절은 쇼비니즘에 기반한 사이비 역사가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한 사건이다. 학문 활동이 반지성주의, 포퓰리즘, 정치 권력이 결합한 폭력에 의해 난도질당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를 우리나라에서 파시즘이 준동하는 징후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