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천추총에서 출토된 문자전
1. 소수림왕의 즉위와 그 배경
소수림왕은 고구려의 제17대 왕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태어난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소수림왕의 이칭으로는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과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는 왕호가 전한다. 전자는 『삼국사기』, 후자는 『해동고승전』에 전하는 이칭인데, 해미류왕은 해주류왕을 잘못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 ‘주(朱)’와 ‘미(味)’의 자형이 비슷한 데다 고구려의 제3대 대무신왕의 이칭으로서 광개토왕릉비에 ‘대주류왕(大朱留王)’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355년(고국원왕 25) 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같은 해 겨울 그의 할머니인 주씨가 포로로 잡혀 갔던 전연(前燕)에서 인질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선 342년(고국원왕 12) 전연의 군대가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 지역까지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고구려군이 크게 패하여 고국원왕이 홀로 도주한 사이 왕모 주씨와 왕비는 전연군에 사로잡혔다. 전연군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하고 고구려의 도읍을 철저히 파괴한 후 온갖 보물과 포로 5만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미천왕의 시신은 다음 해에 고국원왕이 신하를 칭하며 공물을 바쳐 되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왕모인 주씨는 이후 13년이나 전연에 인질로 잡혀 있어야 했다.
소수림왕의 경우 원래부터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예정된 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서에 따르면 340년(고국원왕 10년)에 이미 고구려에서 전연에 세자를 사신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수림왕이 태자로 책봉된 것보다 15년이나 앞선 때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소수림왕에게는 원래 왕위 계승권을 가진 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형이 일찍 사망하는 등 사정이 생기게 되어 소수림왕에게 태자의 자리가 넘어온 것으로 짐작된다[이 기록은 고구려의 자체적인 기록이 아니라 원래 중국 측에 남아 있던 것을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 보충해 넣은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곳에서는 ‘태자’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 데 반해 여기에서는 ‘세자’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랫동안 고구려를 괴롭혀 왔던 전연은 370년(고국원왕 40)에 전진(前秦)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망하였다. 하지만 한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바로 다음해인 371년 백제가 3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남변을 침략해 왔다. 이에 고국원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가 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화살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소수림왕은 전투 중 군주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여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왕위를 계승해야 했다.
2. 왕권 강화와 불교의 수용
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태자가 된 지 16년이 흐른 때였다. 나라를 어떻게 이끌고 개혁해야 할 지 생각을 가다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수림왕이 준비되어 있는 지도자엿다는 점은 고구려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소수림왕의 첫 번째 과제는 왕실의 권위를 되찾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대 전연과의 싸움에서 패해 큰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이후 수십 년간 외교적으로 저자세를 취해야 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백제에 의해 영토를 침탈당하고 급기야 왕이 전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오랜 기간에 걸친 외교적․군사적 실패로 인해 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된 상태였다.
소수림왕은 소해주류왕이라는 이칭을 사용할 만큼 대무신왕을 의식하였는데, 그는 고구려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영웅이자 정복 군주였다. 소수림왕은 스스로를 ‘작은 대무신왕’이라 표방하면서 자신의 몸에 흐르는 혈통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한편, 강하고 위대한 고구려를 만들어 나갈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보다 강력하게 사람들의 정신을 결속할 무언가가 필요하였다.
372년(소수림왕 2) 전진에서 사신을 보내 왔다. 전진은 고구려와 앙숙이었던 전연을 멸망시킨 나라로, 다행히 고구려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때 전진의 사신과 함께 온 이들 중에는 승려인 순도(順道)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전진의 황제인 부견(符堅)이 보낸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었다.
전진 황제 부견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호했던 왕으로, 당시 떠오르는 해의 기세로 영토를 확장하여 화북 지역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소수림왕의 입장에서는 부견이야말로 당대에 모범으로 삼을 만한 군주라고 여겨졌을 법하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적극 장려하면서 외교적으로 전진과의 친교를 강화하였고, 국내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활용하였다.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전진에서 온 순도를 머물게 하였고, 또한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374년에 건너온 승려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다[승려 순도의 출신에 대해 『해동고승전』은 전진에서 왔다는 설 외에 동진(東晉) 출신이라는 다른 설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전진에서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보통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의 시작이라고 일컫는다.
3. 국력의 회복과 백제와의 재대결
소수림왕은 불교를 수용한 해인 372년 태학(太學)[판본에 따라 대학(大學)이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국립 교육 기관으로, 지방에는 민간에서 경당(扃堂)을 만들어 교육을 하였다. 고구려인들은 가난하거나 천한 신분을 가진 이들도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태학의 존재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선도하였을 것이다.]이라는 교육 기관을 세웠다. 이는 왕을 지원하는 관료 집단을 양성하기 위함이었다. 태학에서의 교육 내용은 주로 유교 경전과 무예를 익히는 것이었다고 보이는데, 이러한 교육 기관의 설립이 불교의 수용과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수림왕은 정신적인 구심점으로서 불교의 가치를 인정하였지만, 동시에 현실에 기반한 학문으로서의 유학의 힘 또한 경시하지 않았다. 불교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한 소수림왕이지만, 사실은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는 전문적인 유학 교육 또한 소수림왕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373년(소수림왕 3)에는 율령 반포가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고구려에는 나름의 법체제가 존재하고 있었으나, 율령 반포를 계기로 보다 체계적이고 일원화된 법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통해 국가의 기능과 통제력을 한 단계 더 향상시키고자 하였다[율령(律令)에 율(律)은 형법(刑法)의 범위이고, 령(令)은 행정법(行政法)의 범위에 있다. 이러한 구분은 일반적으로 진(晉)의 태시율령(泰始律令)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즉위 초부터 여러 개혁 조치를 추진하며 차근차근 국력을 회복한 소수림왕은 375년(소수림왕 5)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선제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이듬해인 376년(소수림왕 6) 겨울에도 백제의 북변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377년 10월 백제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으나, 11월에 곧바로 다시 군대를 일으켜 응징하였다.
비록 제한된 기록이기는 하지만 소수림왕의 대 백제 군사 활동은 상당히 공세적이고 또한 능동적이다. 소수림왕이 즉위 초부터 추진하였던 개혁의 성과가 군사 활동에 있어서도 자신감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수림왕은 백제와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에 전진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외교적으로 후방을 철저히 관리하였다. 이는 그의 치밀한 성향을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78년(소수림왕 8) 가뭄이 크게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후 기록에는 더 이상 백제와의 군사 대결이 보이지 않는다. 기록의 누락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소수림왕이 무리한 전쟁이나 부왕의 복수보다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 고구려 전성기의 초석
소수림왕은 384년(소수림왕 14) 사망하였다. 소수림왕의 재위 기간은 14년으로 그다지 긴 편은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위기에 빠진 순간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즉위 초부터 굵직굵직한 개혁 정책들을 추진하여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삼국사기』에서는 소수림왕의 인물됨에 대해 ‘웅대한 계략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면모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림왕이 수행한 정책은 고구려의 국력을 이전만큼 회복시키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국가 체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데 이르렀다. 그 결과 그의 사후에는 요동 지역을 두고 후연(後燕)과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할 수 있었고, 특히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서는 후연이나 백제 등 주변국들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우위에 서는 등 고구려의 전성기를 활짝 열 수 있었다. 소수림왕 자신은 본인이 표방했던 것처럼 대무신왕 같은 정복 군주가 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후대의 왕이 그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도록 훌륭한 체제를 구축하였다. 광개토왕의 눈부신 업적도 결국 소수림왕의 유산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반석 위에 올려 놓은 현군으로서 소수림왕이 고구려사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