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개토왕의 등장과 국제 정세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이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이름이 안(安)으로 기록되어 있다. 386년(고국양왕 3) 13살의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광개토왕대의 연대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의 즉위년이 392년이지만 광개토왕비에서는 391년이다. 양자간에 1년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당대 기록인 금석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대개 광개토왕비의 연대를 따르는 편이다.
광개토왕이라는 왕호는 《삼국사기》에 기재된 것이고, 그의 사후 세워진 광개토왕비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긴 왕호가 등장한다.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 호우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집안 지역 모두루묘에서 발견된 묵서에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는 호칭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에 따라 다소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영토를 크게 개척한 왕이라는 뜻은 상통한다.
고구려의 왕호는 대개 왕이 죽은 후 묻힌 장지명을 따서 지었는데, 광개토왕부터는 생시의 업적을 반영한 왕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광개토왕의 업적이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즉위 후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생존 시에는 ‘영락대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한문의 끊어 읽기에 따라서 광개토왕이 즉위하며 영락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보기도 하고, 단순히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광개토왕 즉위 당시 중국 대륙은 5호 16국 시대였다. 그중 고구려와 국경을 맞댄 나라는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후연(後燕)이었다.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사이에 놓고 후연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고구려와 후연의 악연은 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342년(고국원왕 12) 후연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연(前燕)이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 지역까지 쳐들어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하고 왕의 어머니 주씨와 왕비까지 사로잡아 가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상당 기간 동안 전연에 외교적 저자세를 취해야 했다. 385년(고국양왕 2)에는 광개토왕의 부왕인 고국양왕이 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해 일시적으로 점령하였다가 후연의 반격을 받아 물러나기도 하였다.
남쪽으로는 백제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개토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은 371년(고국원왕 41) 겨울 평양성으로 공격해 온 백제군과 전투를 벌이다 흐르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소수림왕과 고국양왕대에도 양국간에는 수시로 전투가 발생하였다.
2. 광개토왕의 정복 활동
광개토왕은 즉위하자마자 그해 가을 7월 백제를 공격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같은 해 10월에는 고구려군을 7도(道)로 나누어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이후 백제의 반격이 몇 차례 있었으나 모두 격퇴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 관미성에 대한 묘사를 보면 가파른 절벽과 바닷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 개성 부근 예성강 하구,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성 등 여러 설이 제기되어 있다. 어느 쪽이든 관미성이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것은 분명하다. 광개토왕비에는 관미성이 등장하지 않으나 대신 영락 6년조에 각미성(閣彌城)이 등장한다. 학자들은 이를 관미성의 다른 표기로 보곤 한다.
395년(광개토왕 5)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거란의 일파인 패려[稗麗]에 대한 정벌을 감행하였다. 광개토왕은 패려의 3개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였고 수많은 소․말․양 등을 노획해 돌아왔다.
396년(광개토왕 6)에는 다시 백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58성 700촌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고구려군은 백제의 도읍까지 육박하여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아신왕의 항복을 이끌어냈고 앞으로 영원히 고구려왕의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까지 받아냈다. 또한 아신왕의 아우를 비롯하여 대신 10명을 인질로 삼고, 남녀 1,000명의 포로와 세포 1,000필을 획득하여 개선하였다. 398년(광개토왕 8)에는 군대를 파견해 식신(息愼)[숙신(肅愼)] 지역으로 보내 조공을 바치게 하고 고구려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400년(광개토왕 10)에는 1년 전에 있었던 신라 내물마립간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해 신라 경내를 침범한 왜의 군대를 몰아냈으며, 더 나아가 가야 지방에까지 진입하여 대규모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 원정으로 인해 한반도 남부의 세력 구도에 일대 전환이 발생하였다. 고구려를 등에 업은 신라는 가야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신라에 정치적 외교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와 가야 지방에서 고구려군에 패퇴하였던 왜는 404년(광개토왕 14) 지금의 황해도 지방인 대방 지역으로 침입해 들어오기도 했으나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궤멸시켰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407년(광개토왕 17)에도 보병과 기병 5만을 동원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비문이 결락되어 대상을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많은 학자들이 백제를 대상으로 한 전투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앞서 왜군의 신라 침입이나 대방 침입 역시 백제가 배후에서 관여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가 펼친 군사 활동의 대부분은 결국 백제를 주적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 군사 원정을 펼치던 때 서쪽 국경에서는 후연의 침입이 있었다. 400년(광개토왕 14) 후연왕 모용성이 몸소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와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고구려 백성 5,000여 호를 끌고 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후연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고, 양국 사이에는 몇 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 싸움은 407년(광개토왕 17) 후연에 정변이 발생하여 북연(北燕) 정권이 들어서며 비로소 종식되었다. 이때 북연의 왕이 된 고운(高雲)은 고구려계의 인물이다. 고국원왕 때 전연의 침입을 받아 국내성이 함락되었을 때 전연으로 끌려간 고구려인의 후손이 모용씨의 양자가 되었는데, 정변이 일어나며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운은 왕위에 오른 후 오래지 않아 시해되었으나 고구려는 전연 및 후연과 달리 북연과는 대체로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여하튼 후연과의 치열한 전쟁을 거치며 요동 지역은 온전히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410년(광개토왕 20)에는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정벌하였고, 동부여의 지배층, 혹은 집단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압로(鴨盧)들을 데리고 개선하였다. 이것이 기록상에 보이는 광개토왕의 마지막 정복 활동이다. 광개토왕은 2년 뒤인 412년(광개토왕 22) 3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광개토왕은 한국사에서 불세출의 전쟁 영웅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성공적인 군사 활동으로 인하여 개척한 고구려의 영토 역시 넓다. 다만 한국인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과장되어 인식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광개토왕대 고구려가 동북아시아 최강대국이었고, 중국에 있는 나라들도 광개토왕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광개토왕이 넓힌 중국 방향으로의 영토는 요동 지역 정도이다. 중국 대륙 전체를 시야에 넣어서 보면 변경의 극히 일부 지역일 뿐이다. 요동 지역을 두고 광개토왕대 고구려와 대립하였던 후연 역시 전성기를 지나 구석으로 크게 쪼그라든 약소국이었다. 광개토왕을 일부러 과소 평가할 필요는 없겠지만, 과대 평가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3. 광개토왕의 치적
광개토왕은 정복 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치 역시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비에 따르면 광개토왕의 치세에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은 늘어났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물론 왕의 훈적을 드러내기 위해 만든 비이니만큼 칭송의 내용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지만, 광개토왕이 자신의 백성들이 받는 고통에 관심을 기울인 군주였다는 점은 광개토왕비 수묘인(守墓人) 연호조에 보이는 “선조 왕들이 다만 원근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고 한 교언(敎言)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전쟁을 좋아하는 군주들이 영토를 넓히는 데 몰두하느라 백성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주었다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광개토왕의 경우는 남다른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광개토왕이 행한 내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의 미비함으로 인해 알 수 있는 부분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수묘 제도의 정비이다. 광개토왕은 선조 왕들의 능묘 관리를 위하여 수묘 제도를 개혁하고 왕릉마다 석비를 세우는 조치를 취하였고, 위반할 경우에 대한 처벌 조항 또한 법으로 규정하여 명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광개토왕이 법과 제도에 근거한 통치를 중시하였음을 보여 준다. 광개토왕의 통치 모습은 373년(소수림왕 3) 율령 반포 이래의 고구려 통치 체제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왕은 선왕들의 업적을 적극적이고 일관성 있게 계승하며 고구려의 국가 체제를 더욱 정교화하였다.
광개토왕의 내치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평양 지역 경영이다. 광개토왕은 392년(광개토왕 2)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99년(광개토왕 9) 광개토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신라에서 보낸 사신을 접견하였던 사례 등을 감안하면, 이 시기 평양은 이미 고구려왕의 행정적․외교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통치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했던 것 같다. 평양으로의 천도는 그의 아들인 장수왕 대에 이르러 실현되었지만, 그 사전 작업들은 광개토왕 대에 이미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개토왕은 고구려라는 나라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였고 이를 차근차근 추진하였다. 광개토왕 사후 장수왕과 문자명왕의 시대를 거치며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고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게 된 것은 광개토왕이 이룬 군사적 성공뿐 아니라 이 같은 내치에서의 성공을 유산으로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