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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과 잡담

'명징'과 '직조'에 대한 단상

by kirang 2019. 6. 8.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을 보고 블로그에 남긴 감상평이 논란을 일으켰다. 이동진의 감상평은 다음과 같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

  문제가 된 것은 이 감상평에 사용된 '명징(明澄)'과 '직조(織造)'라는 단어이다. 왜 영화 감상평에 이런 어려운 단어를 썼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지적 허세이자 교만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 평론이라는 것은 다수의 독자를 상정해야 하므로 평이한 문장과 단어를 써야 하며, 따라서 이동진은 잘못을 범하였다고 나무란다. 이에 대한 반론도 나왔다. '명징'과 '직조'도 모르는 자신의 무식을 탓해야지, 왜 이동진을 욕하느냐는 것.

  '명징'과 '직조'가 어려운 용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독서량과 한자 능력 등에 따라 천차만별인 주관적 영역일 터이니. 다만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우선 자신이 해당 단어를 모르는 것에 대한 당당함이다. 이건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태도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아마 '나도 배울 만큼 배웠고, 알만큼 안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우리 사회의 높은 대학 진학률도 여기 한몫 했을 수 있고(나도 대학 나온 사람이야), 우리 사회의 낮은 독서량도 한몫 했을 수 있다(내가 주변 사람들 중엔 그래도 책 많이 읽는 편이지. 책 아니더라도 인터넷으로 정보도 많이 얻고).

  인터넷이 등장한 데 이어, 어디서든 넷에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와 글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더 깊이 있는 텍스트 읽기를 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터넷에서 소비되는 글은 가볍고 일상적인 소통을 위한 것들이 많은 지라 어느새 '명징'과 '직조'처럼 일상어에서 벗어난 문어(文語)는 낯설게 여겨지는 환경이 된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용어의 사용에 '잘못되었다'고 질타하는 이들의 사고이다. 이들은 글이라는 게 '소통'을 위한 것이라는 데 방점을 찍는다. 이에 따르면 '명징'과 '직조'는 필자와 독자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글에 이러한 장애물을 배치했다는 건 필자가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독자에게 불편을 강요한 것이고, 따라서 잘못된 행위이다. 이러한 관점에는 어느 정도 일리 있는 구석도 있다. 실제로 원활한 정보 교류를 방해할 정도로 괴상한 용어를 섞어 쓰는 나쁜 문장들의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다만 '그러니까 최대한 쉬운 용어로 모두 바꿔 써야 한다'는 주장은 그것대로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어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이라는 표현을 '오름과 내림으로 선명하게 짜낸'이라는 식으로 바꿨을 경우, 의미는 문제없이 통하지만 글의 맛이 크게 달라진다. 누군가는 후자의 글맛을 더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전자의 글맛을 선호하는 사람은 그럼 어쩌란 말인가.

  글은 의미의 전달이 전부가 아니다. 문예(文藝)라는 말도 있듯이 글에는 미적 추구의 측면이 있다. 최대한 쉬운 용어로 모두 바꿔 쓰라는 요구는 '천공'이나 '창공' 같은 표현도 죄다 '하늘'로 일괄해 바꾸라는 요구와 다를 바 없다. 이건 각각의 단어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결을 말살하자는 이야기이다. 언어의 단순화는 개념과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약한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읽다가 낯선 단어와 개념을 만났을 때는 소통의 불편함에 화를 내기보다 새로운 개념과 표현을 만나 자신의 인식 지평이 넓혀졌음을 기뻐하는 게 나은 태도이다. 배우고 익혀서 나도 기회가 될 때 적확하게 사용하려고 하는 게 좋다. '내가 모르니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식의 태도는 반지성주의로 통하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