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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역사학과 들뢰즈 철학에 대한 단상

by kirang 2014. 8. 13.

  잘 모르는 입장에서 단정하기에는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두 개의 단어로 축약하여 표현한다면 차이와 배치가 될 듯 하다.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을 동일자의 철학이라 비판하며 차이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근본적인 것은 차이이며 동일성은 수많은 차이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재단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차적 개념이다. 들뢰즈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그동안 철학계를 지배해 왔던, 특히 근대 철학에서 정점에 달했던 동일자의 철학은 이제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틀로 기능할 수 없을 것 같다. 데카르트 이래로 공식화 되었던 ‘주체의 인식과 대상 간의 일치를 보장해 주는 개념으로서의 진리’ 역시 무너졌다. 확고부동하고 단단한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로 이루어지는 항과 항의 접촉, 그리고 욕망의 영향을 받은 배치에 따라 주체는 끊임없이 새로 생성되고 변화한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라고 한다. 그리고 차이를 두려워하거나 혐오하지 말고 긍정하라고 이야기한다. 동일한 해석, 동일한 인식의 틀에 대한 거부, 들뢰즈의 철학은  탈주를 제안한다.

 

  역사학자들은 동일한 사료를 통해 자신이 더 정확한 결론을 도출하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논쟁을 벌여 왔다. 이러한 논쟁의 전제는 ‘그때 그 사건’의 실체는 하나이고, 역사학자의 임무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에 있다는 점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단순하고 순진한 인식틀은 역사학 내부에서 강한 도전을 받아왔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역사학에서 해석이 지니는 중요성을 더 이상 간과하지 않는다. 결코 확인이 불가능한 ‘그때 그 사건’의 실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해석이라는 과육의 맛(카의 표현에 따르면)을 즐길 정도의 여유를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은 들뢰즈의 철학으로부터 위기감을 느낀다.

 

  들뢰즈는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학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과거의 사건(실체)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동일하다. 누구도 과거로 날아가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을 확인할 수 없다. 더군다나 과거의 사건을 보고자 안간힘을 쓰는 주체, 즉 역사학자조차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실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밝혀내고자 애쓰는 것은 헛된 노력이 된다. 들뢰즈 철학을 수용하게 되면 역사학자에게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더 이상 학문의 목적일 수 없다. 존재하지도 않고 도달할 수도 없는 ‘과거의 사실’을 찾아 헤매는 것은 무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역사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해석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역사학자가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배치하여 사료를 ‘얼마나 다르게’ 해석해 내는가이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의 전혀 다른 해석들, 그것들이 모두 역사학 연구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일견 근사하고 타당해 보이는 이러한 역사관은 역사학의 근본을 뒤흔든다. 역사학은 문학과 더불어 대표적인 서술형 학문이다. 인간들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두 학문이 공통점이다. 하지만 역사학은 문학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점이 있는데, 역사학의 스토리가 사료라고 불리우는 소스에 철저하게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역사학이라는 학문은 ‘제한된 조건에서 벌이는 논리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은 사료를 통해 과거를 보고, 사료를 통해 과거를 판단하며, 사료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한다. 들뢰즈 철학을 역사학이 수용한다면 하나의 사료를 이용한 풍부하고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라는 장점을 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양한 해석’의 미덕은 그간 역사학에서도 그럭저럭 긍정되어 오던 것이다. 들뢰즈 철학은 더 나아간다. 가능한 해석의 범위가 극단적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모든 차이 나는 해석의 긍정이라는 방향으로. 왜 아니겠는가. 들뢰즈는 동일자의 철학을 비판한다. 


  들뢰즈 철학에는 역사학자가 닿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고정된 진실이 없다. 고정된 진실이 없다면 해석들 간에 우열을 부여할 기준도 없다. 역사학에서의 모든 해석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된다. 문제는 해석의 영역이 이렇게까지 강조된 역사학이 더 이상 역사학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문학에는 역사소설이라는 장르가 있다.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하게 확장된 역사학은 과연 역사소설이라는 장르와 얼마나 차이 나는 것일까. 때문에 나는 들뢰즈 철학과 역사학을 접목시켰을 때 수많은 해석들의 가치 차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만약 해석들 간에 가치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곧 일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더 옳고, 더 옳지 않은 것들로 해석들을 분류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들뢰즈가 비판하는 동일자의 철학으로의 회귀가 된다. 

 

  들뢰즈 철학과 역사학의 접목과 관련하여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실천의 문제이다. 역사 해석은 실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대상의 과거를 보고자 한다. 또 과거의 해석을 통해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앞으로의 행동의 근거로 삼고 싶어 한다. 이처럼 실천의 주요한 에너지로 작용하는 역사 해석이지만 들뢰즈의 방식을 따를 경우 자기 확신의 성격을 잃게 된다.

 

  들뢰즈 철학을 수용하면 나와 다른 사람의 사고와 역사관은 차이의 철학이라는 개념으로 존중된다. 그러나 혁명은 나와 다른 사고를 가진 이들에 대한 배제 과정을 통해 수행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내가 옳고, 저쪽이 틀리다는 철저한 자기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쪽과 저쪽이 모두 가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과연 혁명을 할 수 있을까. 예컨대 87년 6월 항쟁은 12.12가 부도덕하며 군사독재가 비민주적이라는 역사인식을 가진 이들이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던 이들에 대해 벌인 싸움이었다. 들뢰즈의 철학을 수용한 역사인식에서 그러한 혁명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상이 내가 생각한 역사학에 들뢰즈 철학을 적용했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점들이다. 그러나 사실 들뢰즈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쓴 것이므로, 완결된 논리라기 보다는 공부 과정에서의 의문 사항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한 해답은 공부를 하며 차차 찾아나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