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은 자기 전공 시대 외의 글을 쓸 때 매우 조심스러워 한다. 본인의 지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알기에 오류의 가능성을 떨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덕일이 쓰는 글을 보면 고조선에 고대 삼국부터 조선 시대, 근대사까지 안 건드리는 분야가 없다. 왜일까, 천재라서? 그러기엔 이덕일의 글은 객관적 오류가 너무 많고, 자기 혼자 생각을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여 서술하는 경우 또한 많다.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이덕일을 학자로 보지 않는다.
이덕일의 글이 재미있고 많이 읽히는 이유는 일단 그가 지니고 있는 문재(文材)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그가 사용하는 글쓰기 방식이 ‘역사’라기보다 ‘소설’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역사적 실체에 대한 논리적 접근과 복원보다 ‘이렇게 쓰면 더 재밌겠다, 혹은 이렇게 접근하면 사람들에게 먹혀들겠다’가 그의 기본적인 글쓰기 태도이다. 역사학은 소설과 달리 사료적 근거와 개연성 있는 논리적 추론을 갖추어야 한다는 제약을 강하게 받는다. 여기에서 자유로우면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재미있는 이야기를 서술할 가능성도 높아지지만 대신 역사라기보다 소설, 속된 말로 '뻥'이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덕일의 또 한 가지 세일즈 포인트는 쇼비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에 우호적인 편이라 이 분야에 양념을 적당히 뿌리면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기대할 수 있다. 이덕일은 여기에 더해 본질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을 끌고 들어와 자기 글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덕일의 묘사에 따르면 그는 우리나라의 진실한 역사를 발굴해 알리고 있는 외롭고 정의로운 투사이다. 그 대척점에는 ‘식민 사관에 물든 주류 역사학계’라는 거대한 악이 있다. 그런데 이거 어디에서 본듯한 모습이 아닌가. 그렇다. ‘충무로’라는 거대 악을 상정하여 핍박받는 비주류 영화인으로서 스스로를 포장한 심형래와 똑같다. 실제로 역사학계에서 이덕일의 포지션은 영화계에서의 심형래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이덕일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한중수교 이후에 중국에 왔다 갔다하게 되니까 그쪽 중국 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조선 유물유적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주장하는데, 그야말로 자기 혼자 하는 망상이다. 중국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에 ‘메이드 인 고조선’이라고 써져 있는 게 아니다. 홍산 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라고 단정할 어떤 근거도 없다. 심지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지표라 언급되는 고인돌이나 비파형 동검, 미송리형 토기조차도 고조선의 독자적인 유물이라 단정하기 힘든 면이 있다. 이들 유물들의 중심 분포 범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문화적 지표인 유물만 가지고 고대 정치체의 영역을 한칼에 단정하는 행위가 위험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느냐의 문제. 이미 수십 년 전에 다 정리된 내용이다. 문헌적 연구가 미성숙하고, 고고학적 발굴이 거의 없었던 100년 전에는 있을 수도 있는 논란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 평양 지역에서 발굴되어 쏟아져 나온 낙랑 유물만 해도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상태이다. 심지어 기원전 낙랑군의 25개 현별 호구조사 명부까지 출토되어 낙랑군의 기원전 인구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현재 학계의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덕일은 여전히 진도를 못 따라잡은 채 100년 전에 신채호가 했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재탕 삼탕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덕일이야 본인 장사에 도움이 되니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며 책을 내고 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휘둘리는 사람들은 안타깝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딴지일보 벙커 팟캐스트에 이덕일이 초대되며 '이 시대 최고의 역사학자'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개까지 받는 것을 보며 실소하고 말았다. 사이비가 득세하는 대중 역사계의 처참한 현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