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기랑의 백지 채우기
  • 기랑의 백지 채우기
  • 기랑의 백지 채우기
역사 노트

병자호란 쌍령 전투는 정말 300대 4만이 싸워 진 전투인가(1)-배경

by kirang 2015. 7. 19.

들어가며

  쌍령 전투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전투이다. 병자호란이 왕이 직접 나가 무릎을 꿇은 치욕적인 패배였고, 그 패배한 전쟁의 패배한 전투라면 그다지 기억에서 호출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랬던 쌍령 전투가 최근에는 임진왜란기의 칠천량 전투, 6.25전쟁기의 현리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이라는 달갑지 않은 호칭을 받으며 새삼 주목받는 듯하다. 상대적으로 인지도와 관심이 떨어지는 쌍령 전투가 당당하게 '한국사 3대 패전'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은 전투에 참여한 병력의 차이 때문이다. 쌍령 전투는 청나라 군대 300명 대 조선군 4만 명이 싸워서 조선군이 전멸을 당한 전투로 회자되고 있다. 사실이라고 한다면 정말 황당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이 내용이 사실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에 병자호란 발발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실제 쌍령 전투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병자호란의 발생 배경

  만주의 여진족은 1616(광해군 8) 누루하치[努爾哈赤]의 주도 하에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에 명은 대군을 동원해 후금을 공격하며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였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은 두 나라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었으므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강홍립(姜弘立) 이하 1만 명의 조선군이 1619년 대() 후금 전쟁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사르후 전투에서 참담한 대패를 당하고 만다. 승패의 향방이 결정되자 조선군의 잔존 병력은 곧바로 후금군에 투항하였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전쟁 중 형세를 관망하여 조선에 유리하게 행동하라고 밀지로 지시해 두었던 터였다. 항복한 강홍립으로부터 두 나라 사이에 낀 조선의 곤란한 상황에 대해 들은 누루하치는 조선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조선군의 장수와 병사 상당수를 석방하여 귀국케 하였다.

청태조 누루하치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한치 앞을 장담할 수 없는 당시의 위태로운 국제 정세 하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나, 이는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국내 정치에서의 갈등이 더해져 1623(광해군 15) 서인(西人)들이 주도하는 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폐위되어 유폐되었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이 새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인조(仁祖)이다인조가 반정을 일으킨 명분이 의리에 있었던 만큼 조선의 외교 정책은 순식간에 일변하여 명과의 우호 관계 회복을 전면에 내세우며, 후금과는 일체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자연히 양국 간에는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에서는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에도 논공행상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느꼈고, 결국 불만이 폭발하여 북방 정예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의 반란군은 한성을 함락시키는 등 크게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의 북방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주요 병력이 손실되었고, 도주한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망명하며 조선의 상황과 친명배금 정책의 실상을 알리게 됨으로써 조선의 대 후금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1627(인조 5) 1월 마침내 후금이 기병 3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정묘호란이 발생한 것이다. 후금의 군대는 의주를 점령한 이후 용천안주를 함락하였고, 계속 남하하여 평양을 거쳐 황주평산으로 진격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조선은 임진왜란 때의 경험에 따라 분조를 결정하였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세자를 전주로 보내어 삼남 지방의 병력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이후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지루한 강화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마침내 양국이 형제의 맹약을 맺기로 하며 전쟁이 종식되었다. 양국 사이에는 정기적으로 사신의 왕래와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조선은 아우의 나라로서 매년 후금에 세폐(歲幣)를 보내게 되었다.

  전쟁은 끝났으나 양국의 관계는 위태로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금은 조선에 대해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조선 측에 자국 사신의 접대를 명과 동일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고, ‘형제의 관계군신의 관계로 개정하자고 요구하는 한편, 세폐를 증액할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면서 양국 관계는 험악해졌다. 결정적으로 16364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위에 오르게 되었음에도 조선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두 나라 간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청 태종 홍타이지

병자호란의 발생과 조선군의 저항

  1636128일 청 태종은 친히 12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의주의 방어를 담당하던 임경업(林慶業)은 인근 백마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였으나, 청군은 싸움을 피하고 바로 남하하였다. 이후에도 비슷한 현상이 계속 발생하였다. 조선군은 산성을 중심으로 한 거점 방어 전략을 펼쳤지만, 청군은 산성을 무시하고 빠르게 남하하는 전략을 펼쳤다. 조선군이 각지의 산성에 고착되어 있는 사이 청군은 기동성을 이용하여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수도 한성으로 접근하였다.

  조선의 조정이 청군의 공격을 보고받은 것은 전쟁이 시작된 지 6일 후인 1213일이었다. 당황한 조정은 다음날인 14일 아침 종묘의 신주를 비롯하여 비빈과 왕자종실백관의 가족들을 강화도로 피신토록 하고 인조 역시 오후에 한성을 출발하여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이미 한성 부근까지 진출하여 양화진과 개화리 일대로 병력을 보내 강화도로 통하는 길을 차단한 상태였다. 당황한 인조는 말을 돌려 한성으로 돌아갔다가 최명길(崔鳴吉)의 제안에 따라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하였다.


삼전도는 지금의 롯데월드 부근이다.

  인조는 교서를 내려 남한산성의 위급함을 알리고 각도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들에게 구원병을 이끌고 오도록 지시하였다. 청군은 1222일부터 대규모 공격을 가해왔지만 조선군은 수비의 유리함을 이용하여 잘 막아냈다. 하지만 1230일에 청 태종이 직접 이끄는 청군의 주력이 삼전도로 도착하여 병력을 배치하니 남한산성의 상황은 더욱 위급해졌다. 남한산성에 피신한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오직 각도의 근왕병들이 와 구원해 주는 것뿐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진격로와 조선군의 움직임

  각도의 관찰사병마절도사들은 인조의 명에 따라 관할 지역의 군사를 소집하였으나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개중 가장 빠른 움직임을 보인 것은 강원도의 근왕병이었는데강원도 관찰사 조정호(趙廷虎)는 12월 24일 강원도 근왕병 7,000명을 이끌고 양근(楊根)[경기도 양평군]으로 진군하였고, 12월 26일 선봉장 권정길(權井吉)이 1,0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 남쪽에 위치한 검단산(檢丹山)으로 진출하여 밤에 횃불을 올려 남한산성에 근왕병이 당도하였음을 알렸다그러나 이 병력은 이튿날에 청군과 교전하여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말았다선봉 부대가 전멸한 강원도 근왕병은 크게 사기가 떨어져 이후 도망자가 속출하는 등 군단으로서의 체제가 무너지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는 7,000여 명의 군사를 모아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를 선봉으로 앞세워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충청도 근왕병은 1월 2일 남한산성 남쪽 40리 지점인 험천현(險川峴)[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도착하여 포진하였다이에 청의 장수 양굴리(楊古利)가 이끄는 청군이 높은 산봉우리 쪽에서부터 내려오며 공격을 하였는데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가 전투가 발생하기 전 도주한 가운데 관찰사 정세규 이하 군사들은 하루 동안 10여 차례 공방을 벌였다그러나 해가 저물 무렵 결국 청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열이 무너지게 되었다. 관찰사 정세규는 바위에서 떨어졌으나 이를 알아본 병사가 구출하여 가까스로 탈출하였다병력의 태반을 잃은 충청도 근왕군은 이후 공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전라도 근왕병 8,000명은 전라도 관찰사 이시방(李時昉)과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金俊龍)의 지휘를 받아 1월 4일 남한산성 남방 100리 지점인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했다. 1월 2일 험천 전투에서 충청도 근왕군을 무너뜨린 양굴리의 청군은 1월 5일부터 전라도 근왕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그러나 전라도 근왕군은 진영 주변에 목책을 만들고 포수궁병창검병을 3선 배치하여 효과적으로 적을 막았고혼전 중에 청의 주장 양굴리를 사살하였다이에 청군은 일시에 전열이 와해되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광교산 전투에서의 이 승리는 병자호란 기간 중 조선군이 거둔 최초이자 최대의 승전이었다더구나 양굴리는 청 태종의 매부(妹夫)그간 전공이 상당히 많았던 이름 있는 장수였다다만 전라도 근왕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탄약과 군량이 떨어져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원 및 공주로 철수하였으므로전투에서의 승리가 전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충청도 근왕병이 싸운 험천 전투가 있었던 날짜가 1월 2일, 전라도 근왕병이 싸운 광교산 전투가 있었던 날짜가 1월 5일이다.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경상도 근왕병의 쌍령 전투가 있었던 날짜는 그 사이인 1월 3일이다. 과연 쌍령에서는 어떤 싸움이 벌어졌던 것일까.

(2)편(http://kirang.tistory.com/721)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