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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과 잡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잡아먹다 2

by kirang 2009. 6. 16.

  이명박의 선택이 불행한 것은 일단 폭력이 동반된 공권력에 기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이다. 힘에 의존하는 권위주의는 기호지세와 같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더 안 좋은 것은 보궐선거를 통해 드러난 민심의 방향이 이명박에게 별다른 압박감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총선은 대선이 끝난 직후 이명박에 대한 기대치가 최고조이던 시절에 치러졌다. 한나라당은 이미 4년간 헌법개정도 넘볼 수 있을 정도의 절대 다수당의 자리를 보장받은 상태이다. 민심이 돌아선 것은 명확하지만, 이처럼 행정부와 입법부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보궐선거에서 몇 석을 잃은 정도의 패배는 이명박의 권력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나라 대의 민주제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바로 정치에 있어서의 책임의부재이다. 이명박은 이미 대통령이 되었다. 입법부 역시 대통령 당선과 동시에 완전히 장악하였다. 자,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이명박이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국회의원들은 연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4년 뒤의 선거를 대비해 국민의 눈치를 볼 이유가 조금은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대통령제는 5년 단임제이다. 어차피 그 이후는 없다. 이미 입법부도 장악한 마당이니, 최소한 4년간은 마음만 먹으면 하고 싶은대로 맘대로 할 수 있다. 대통령 이명박이 국민들에게 머리 숙이며 아쉬운 소리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물론 정치적 도의라는 게 있다. 자신을 지지해 주고 권력을 위임해 준 국민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요구에 귀기울여 이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름 도의를 지키는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명박의 살아온 행적을 보면 그에게 그러한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정치판은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 야바위판이 된다. 말도 안 되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불량품을 구입했지만, 환불도 안 되고 AS도 못 받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5년간 불량품을 대체할 새 제품을 구입할 수도 없다. 


  이명박은 바닥에서부터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자신의 선택이 결국엔 옳고, 성공으로 귀결된다는 강한 확신을 체화한 사람이다. 이러한 성향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전임 대통령인 노무현에게서도 언뜻언뜻 보인 바 있다. 하지만 노무현은 오랜 기간의 독서와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을 통해 이러한 성향을 어느 정도 통제할 줄 알았다. 반면 이명박은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본인의 무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유형의 인물이다.


  그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수용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반대로 자기 생각과 성공담을 늘어 놓으며 지시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다. 툭하면 '나도 한때는 ○○했다'고 떠들어 대는 그의 말버릇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게다가 기독교 교인으로서 특유의 소명의식까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신이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내려 주신 넘어서야 마땅할 장애물 정도로 여기는 듯 하다. 하여 이명박은 아무런 내적 갈등없이 국민들의 목소리와 요구를 적극적으로 '씹기' 시작한다.


  이명박은 국민들이 아무리 약이 올라도 실제로 자기를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작년 여름 수십 만의 군중이 청와대 지척의 거리에 결집하여  한 달이 넘게 반정부 구호를 외쳤지만, 결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까지 나가지는 않았다. 청와대로 가는 도로와 골목을 전경버스와 컨테이너로 죄다 틀어 막은 명박산성 때문에? 아니다. 국민들이 정부와 국가 시스템 전체를 갈아 엎어야 하는 혁명 상황까지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이 정부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는 확신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면 이명박은 이미 망명객 신분으로 추락해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명박산성이라도 결기로 달려드는 수십 만의 사람들을 막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경고를 하고, 위협을 하는 딱 그 선까지 가고 멈춰섰다. 아니, 사실은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형식적이나마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구성된 민주정의 힘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은 그러지 못했다. 정권 취득 과정이 불법이고 정의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물리력을 행사하여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배제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들 정권은 폭압적인 권력행사를 하였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허약한 체제였다. 하지만 형식적 대의민주제가 충분히 자리를 잡은 지금,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것은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 결과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투표를 하는 것과 제발 말 좀 들으라고 시위를 통해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대단히 불행하게도 대통령에게 가장 큰 압박감을 줄 수 있는 총선은 이미 끝났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전혀 수용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민들의 외침은 외려 배후 소요세력에 의해 조장된 불법시위 소리를 들으며 입을 틀어 막히며 탄압당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꼴통을 대통령으로 뽑았고, 그 결과 형식적 대의민주제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상황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