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령에서의 싸움
경상도 근왕군은 경상도 관찰사 심연(沈演)의 지휘 아래 조직되었다. 그는 경상도 좌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경상도 우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을 선봉으로 삼아 앞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후방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경상도 근왕군은 1월 2일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인 무갑산과 등리봉이 마주보이는 쌍령에 도착하였다. 허완의 좌병사군은 남쪽에, 민영의 우병사군은 북쪽에 진을 쳤다고 하므로 쌍령 고개의 길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누어 진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과 쌍령의 위치
진을 치는 과정에서는 약간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였다.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이 진영 위치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산 위로 진을 옮기자고 세 번이나 요청하였으나 허완에게 거부되었던 것이다. 허완은 사격 실력이 뛰어난 상등 포수와 가려 뽑은 정초군(精抄軍)을 진의 안쪽에 배치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바깥쪽에 배치하였다. 포수들에게는 매우 소량인 2냥(兩)씩의 화약이 지급되었다. 이에 초관(哨官)이었던 이택(李擇)이 천총(千總) 이기영(李起英)을 통하여 “바깥을 감당하지 못하면 중앙을 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정예병을 바깥 쪽에 배치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일등 포수의 수가 부족하여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묵살되었다. 경상도 근왕군은 그렇게 쌍령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1월 3일 날이 밝자 경상도 근왕군은 크게 당황하였다. 청군이 밤새 조선군이 진을 친 산의 봉우리로 이동하여 높은 지형을 차지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후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전투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청군은 좌병사군이 진을 친 산등성이의 산봉우리(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남쪽 산의 높은 봉우리)에 붉은 깃발을 세웠다. 이후 한 군졸이 병기도 없이 나무 방패만을 가지고 조선군 진영을 향해 전진해 왔으며, 그 뒤를 병기를 가진 이들이 연이어 따라왔다. 모두 33명이었는데, 이를 본 조선의 사수와 포수 50~60명이 나아가 싸웠다.
조선군 포수들이 어지럽게 총을 쏘자 청군 병사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청군은 주춤하며 전진을 멈추었으나 조선군 포수들에게 지급된 화약의 양이 적었던 터라 금방 바닥이 났다. 청군과 대치하던 조선군은 다급하게 화약을 더 지급해 주기를 요청하고 일등군과 정초군을 보내달라고 소리를 쳤다. 이를 지켜보던 청군은 조선군이 화약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갑작스럽게 돌격을 시도하였다. 청군이 목책을 뛰어넘어 조선군의 진중에 돌입하자 당황한 조선군은 총 한 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전열이 무너져버렸다.
공황 상태에 빠진 조선군은 앞 다투어 도망을 시도하였다. 밀집되어 있던 인파가 적을 피해 한쪽 방향으로 일시에 몰리자 대혼란이 일어났다. 도주하던 조선군이 적을 막기 위해 설치하였던 목책 앞에서 넘어지고 엎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압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앞 사람의 시체를 밟고 운 좋게 목책을 넘어도 다시 추락하여 죽고, 그 뒤에 오던 사람이 다시 떨어져 밟혀 죽으니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지휘관인 좌병사 허완조차도 도망을 시도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압사하였다.
쌍령 전투 추정도
좌병사 진영이 허무하게 붕괴되자 청군은 맞은편 언덕에 진을 치고 있던 우병사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우병사군은 다가오는 청군을 향해 어지럽게 사격을 가하였고, 청군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병사군 역시 포수들에게 화약을 2냥씩밖에 지급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급하게 화약을 재지급하기 위해 서두르다가 불붙은 심지가 화약 더미에 잘못 떨어지고 말았다. 진중에서는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조선군은 크게 동요하였고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 청군이 돌격하니 민영을 비롯한 우병사군 역시 궤멸을 피할 수 없었다. 후방인 여주(驪州)에 머물고 있던 관찰사 심연은 허완과 민영이 전사하고 경상도 근왕군 전군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령으로 도주하였다.
왜 졌는가
쌍령 전투의 패전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척후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허완과 민영은 적과의 거리가 30~40리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척후를 제대로 운영하지 않아 밤새 청군이 접근하여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는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이는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둘째, 주둔할 곳을 선택함에 있어서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는 점이다. 전투의 양상을 보면 조선군은 먼 곳까지 시야가 확보되고 전투 시 유리함을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산등성이에 진을 쳤다. 아마도 청군이 평지의 길을 따라 공격해 오리라 예상했던 때문일 것이다. 예상대로만 되었다면 청군은 길 양쪽으로 나누어 진을 친 조선군의 협공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군은 밤새 조선군을 우회하여 다음날 아침 오히려 더 높은 산봉우리 쪽에서 공격을 해 왔다. 조선군이 순식간에 공황에 빠져 붕괴된 것도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방면에서 적이 출현하고, 아군이 지리적인 불리함을 안게 되었다는 낭패감에 휩싸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셋째, 병사들의 상태와 사기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종사관으로 있던 도경유(都慶兪)의 실책이 전한다. 경상도 관찰사 심연은 도경유를 종사관으로 삼아 군대의 일을 모두 맡겼는데, 도경유는 근왕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진군할 적에 서두르지 않고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우병마절도사의 군관인 박충겸(朴忠謙)의 목을 베기도 하였다. 이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의복을 모두 버리고 입고 있는 옷가지조차 잘라 가볍게 만든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하게 하였으니, 쌍령에 도착할 즈음에는 굶주리고 추위에 지친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는 것이다.
도경유는 쌍령 전투 당시 우병사진에 있었으나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차후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유배를 가다가 원한을 품은 누군가의 저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범인으로는 박충겸의 두 아들들이 지목되었는데, 이들은 고발을 받아 한동안 옥에 갖히기도 했으나 결국 증거가 없다고 하여 풀려났다. 일설에는 쌍령 전투 당시의 화약 폭발 사건이 박충겸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저지른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와전된 이야기로 여겨진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살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중범죄이기 때문에 도경유 피살 이후 새삼스럽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는 모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쌍령 전투의 규모에 대한 검토
쌍령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의 숫자는 불확실하며 혼란스럽다. 남급(南礏)의 《남한일기(南漢日記)》에 따르면 경상도 좌병마절도사 허완이 지휘한 병사 수가 2만여 명, 경상도 우병마절도사인 민영이 지휘한 병사의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여 합하여 4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김시양(金時讓)이 쓴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에서도 경상도 좌병마절도사 허완ㆍ우병마절도사 민영과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 등이 3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쌍령(雙嶺)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쌍령 전투에 참가한 인원이 4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쌍령 전투의 관련자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심연의 묘갈명에는 “두 절도사와 병사가 3만여 명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들 기록을 신뢰한다면 쌍령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의 병력은 3만~4만 명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첫째, 당시 조선의 군사 체제에서 경상도 한 지역에서 단기간에 급히 모은 병력이 3~4만 명에 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둘째, 전장이 되었던 쌍령은 지형이 상당히 협소하여 3~4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진을 칠 수 있는 곳인지 의문이 든다는 점이다. 셋째,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는 쌍령 전투의 전개 내용을 보았을 때 도저히 그 정도의 대규모 전투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다른 도에서 동원된 근왕군 병력 수를 보면 대개 7,000~8,000명 정도로 파악된다. 유독 경상도에서만 다른 지역의 몇 배에 달하는 병력이 동원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적의 소규모 병력 난입에 공황 상태에 빠져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 아무리 훈련이 되지 않은 병력이라 하더라도 3~4만에 달하는 군세였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물론 3~4만 병력을 운운하는 내용이 조선시대 만들어진 여러 문헌들에 기재된 것은 분명하므로, 당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인식을 가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인된 기록이 아닌 이상 당시 사람들이 풍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부정확한 소문이 반복적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당시 실제 병력 수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다. 《인조실록》을 보면 “경상 병사 민영이 어영군 8,000과 본도 병마를 이끌고 23일에 충주 수교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확인된다. 그런데 3~4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설명하면서 ‘어영군 8,000명과 본도 병마’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보고서에서 밝혀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름아닌 전체 병력 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영군은 인조대에 들어서야 조직되기 시작한 중앙 정예군으로 당시까지만 해도 전체 병력은 5,000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체 병력 수를 훌쩍 뛰어넘는 8,000명의 어영군이 경상도에서만 징발되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당시 어영군은 예산 문제로 한양 지역에 상주하지 못하고 수를 쪼개어서 지방에서 교대로 상경해 근무하는 번상 형태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인조실록》의 위 보고는 경상도 지역에 배정되었을 '수백 명'의 어영군의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어영군을 포함한 본도 병마 8,000명', 혹은 '어영군 (수백 명)과 본도 병마 8,000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여겨진다. 쌍령 전투에서 좌병마절도사 허완은 사격 실력이 뛰어난 상등 포수와 가려 뽑은 정초군(精抄軍)을 진의 안쪽에 배치하였다고 하였는데, 혹 이들이 바로 어영군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또한 《숙종실록》을 보면 정언(正言) 김홍복(金洪福)이 “험천(險川)의 전쟁에서 사졸(士卒)로서 죽은 자가 쌍령에 못지않고[險川之役 士卒死者 不下於雙嶺]……”라고 임금에게 아뢴 내용이 확인된다. 이는 수사적 성격이 강한 문장이지만, 충청도 근왕병들이 패배한 험천 전투에서의 전사자가 쌍령 전투의 전사자와 그렇게 큰 격차가 난다고 인식하지는 않는 인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해 보면 실제 동원된 경상도 근왕군의 수 역시 다른 지역과 비슷하게 8,000명을 웃도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여겨지는 바이다. 게다가 후방에 머무르며 쌍령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경상도 관찰사 심연의 병력과 강행군을 하는 과정에서 낙오되었을 병력도 감안해야 하므로, 실제 쌍령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 숫자는 수천 명 수준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쌍령 전투에서 허완과 민영이 지휘한 군사가 3~4만 명이라는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는 전국에 근왕군을 보내라고 전교하였는데,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근왕군은 사실상 남한산성 근처까지 오지 못하였다. 병력의 일부라도 남한산성 부근까지 진출하여 전투를 수행한 근왕군은 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4개 지역 근왕군뿐인데, 한 도의 근왕군 숫자가 8,000명 가량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남한산성에서 전투를 벌인 4개 지역의 근왕군 수를 모두 합치면 3만 명을 웃돌게 된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당시 가장 대표적인 패전이라 할 수 있는 쌍령 전투에서 이 병력 전부가 전몰된 것처럼 오도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는 《하담파적록》에서 쌍령 전투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를 한데 묶어서 쌍령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서술한 점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3~4만 명이 실제로 동원된 숫자가 아니라 '동원되었어야 할 숫자'였을 가능성이다. 근왕병의 동원은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 급하게 이루어졌기에 그 과정에서 군적에 따른 병력 동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전후 책임을 두려워한 각 지역의 수령 등 관련자들이 자신이 동원한 병력 수를 부풀려서 주장했을 수도 있다.
몇가지 흥미로운 기록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의배라는 인물은 상당히 의문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직책상 원래 충청도 근왕군을 이끌어야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남한산성 근처까지 왔다가 전투가 발생하기도 전에 관찰사와 자신의 병력을 적 앞에 방치한 채 도주하는 행위를 하였다. 그랬던 그가 험천 전투 다음날인 1월 3일 쌍령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험천과 쌍령의 거리를 감안하면 그가 쌍령 전투 직전에 경상도 근왕군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지휘권을 가진 군대를 버리고 도주한 이가 바로 다음날 다른 부대에 합류해 싸우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누가 보아도 자연스럽지 않다. 아마도 적전 도주라는 치욕스러운 행적을 덮기 위해 이의배의 집안에서 나온 주장이 아닐까 여겨진다.
실제로《연려실기술》은 이의배가 쌍령 전투에 참여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가 전사했다고도 하고, 살아서 도망갔다는 설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나중에 그의 시신이 나타나자 관을 깨 확인하자는 의논도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정확한 내막을 알기 어렵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것이다. 이의배가 험천 전투 직전에 도주한 이후 처벌을 두려워해 쌍령에서 전사한 것처럼 꾸미고 한동안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채 숨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쌍령 전투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경상도 좌병마사 허완의 최후에 대해서도 기록이 사뭇 상반된다. 《연려실기술》에서는 허완의 인물됨에 대해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고 하였으며, 적군이 진에 난입할 때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만 보면 허완은 여지없는 졸장의 모습이다.
이에 비해 허완의 묘비문에서는 종사관 도경유가 허완의 반대를 무릅쓰고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적의 복병에 걸려 전군이 패몰하였다고 적고 있어 패전의 책임을 완전히 도경유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또한 허완 본인은 중과부적인 상황에서도 맹렬히 싸우다가 최후의 순간에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당당하게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 역시 허완의 집안에서 그의 최후를 최대한 미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맺음말
쌍령 전투는 틀림없이 치욕스럽고 처참한 패배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에도 관련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이러저러한 변명과 왜곡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 회자되는 것처럼 300명의 적을 대상으로 3~4만 명이 싸움을 벌였다가 전멸한 황당한 전투였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조선군의 병력 수는 3~4만 명이 아니라 수천 명 수준, 많이 잡아도 1만 명 전후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연려실기술》에서는 300여 명의 적 기병에 좌우 양군이 무너졌다고 하였으므로, 실제로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청군의 주력은 수백 명 단위였다고는 생각된다.
하지만 조선군 진영에 난입한 300여 명의 청군이 상성상 근접전에서 보병에 월등하게 우월한 기병이라는 병종임을 감안해야 한다. 단순히 머릿수로만 논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탱크 1대와 보명 1명을 1:1로 등치시켜 병력 비교를 할 수는 없다. 비슷한 시기 충청도 근왕군과 충돌한 험천 전투나 전라도 근왕군과 충돌한 광교산 전투에 동원된 청군의 병력을 참고하면, 실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 쌍령에서 조선군과 대치하였던 청군의 전체 병력수 역시 수천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쌍령 전투는 역사상 수없이 발생하였던 수천 명 단위의 병력이 충돌한 평범한 전투 중 하나 정도로 보는 게 옳을 듯 싶다. 300명 대 4만 명이 싸워서 졌다는 이야기를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 '한국사 3대 패전'이라는 타이틀로 엮어 흥미 위주로 언급되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