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내용은 다년간의 채점을 통해 느낀 점들을 정리한 것이다. 점수를 일거에 점프시켜 줄 '신의 기술' 따위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알아 두면 좋을 내용이다.
1. 공부를 해라.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전혀 안 했다...... 이 경우는 답이 없다. 공부를 티끌만큼도 안 하고 좋은 점수를 받으려 한다면 도둑놈 심보다. 그런 요령은 없다. 일단 공부를 어느 정도 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해 보자.
2. 가독성 향상을 위해 답안 작성시 진한 펜을 사용하라.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신의 악필을 걱정한다. 그러나 악필 때문에 점수에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저히 해독이 안 되는 수준이라면 문제가 되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글씨가 예쁘지 않고 초등학생 같이 삐뚤빼뚤해도 알아볼 수만 있게 쓰면 뭐라 하는 채점자 없다.
악필보다 점수에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이 필기구이다. 답안을 깔끔하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지우개로 수정이 가능한 샤프펜슬이나 연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채점자 입장에서 샤프펜슬이나 연필은 전혀 반갑지 않은 필기구이다. 많은 대학에서 시험 답지는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갱지 비슷한 종이인데, 여기에 샤프나 연필을 사용하면 가독성이 심각할 정도로 떨어진다. 그에 비해 진한 볼펜이나 수성펜, 만년필 등으로 작성한 답지는 가독성이 월등히 좋다.
채점자는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백 개가 훨씬 넘는 답안지를 채점해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채점은 매우 기계적이고 지루한 작업이다. 그런 상황에서 눈에 힘을 주며 읽어야 하는 흐릿한 답지는 짜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채점자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알록달록한 색깔 펜으로 답지를 작성해도 안 된다. 교칙에 따라 0점 처리가 될 소지도 있다.
답안 작성은 검은색 혹은 파란색의 굵고 진한 펜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쓰다가 수정할 게 있으면 두 줄로긋고 바로 이어서 쓰면 된다. 굳이 수정액을 쓸 필요도 없다. 갱지에 하얀색 수정액을 칠해 봤자 펜으로 찍찍 그은 것보다 깔끔해 보이지도 않는다.
답지는 마음껏 사용한다. 대부분의 대학교 시험에서 답지는 무제한으로 제공된다. 어차피 자신이 낸 등록금으로 산 비품이다. 아끼지 말고 마음껏 쓴다.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쓴 1장짜리 답지보다 큰 글씨로 넓직넓직하게 쓴 2장짜리 답지가 약간이나마 낫다. 문단마다 한 줄씩 띄어 구분해 주는 것도 좋다. 가독성을 향상시켜 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답지의 장수가 한 장 더 늘어난 데에서 오는 시각적 효과가 은근 작용할 여지가 있다. 물론 내용도 없이 장수만 늘려 태평양처럼 휑한 답안지는 역효과를 낸다.
3. 감점제 채점방식에 유의하라.
인문사회계 과목의 시험은 많은 경우 논술형이다. 객관식이나 단답형 시험과 달리 이 경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채점을 하는 것인지 감을 못잡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논술형 시험도 아무 기준 없이 막무가내로 채점하는 것이 아니다. 다 나름대로 기준이 있다.
가장 선호되는 것이 감점제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서술하라는 문제를 냈을 때, 해당 주제를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용어, 개념, 서술을 몇 개 선정하고, 그것이 모두 들어갔으면 만점을 주고, 하나씩 덜 들어갔을 때마다 점수를 깎는 방식이다. 다소 기계적이고 어떻게 보면 치사하다고 할 수도 있는 방식인데, 점수에 대한 학생의 이의가 들어왔을 때 채점자가 가장 명쾌하게 근거를 댈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방식은 학생이 얼마나 수업을 충실히 소화했는지에 대한 비교적 유용한 검증방식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채점자들이 이 방식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답안 작성자는 해당 문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항은 남김 없이 언급해 주는 게 좋다. 5개를 알고 있는데 그중 중요한 것 3개만 추려서 언급하고 그것을 심화해서 집중적으로 논한다? 좋은 선택이 아니다. 차라리 간략하게 건드리는 식으로라도 5개를 다 언급해 주는 게 좋다. 글의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구성을 위해 중요한 것 몇 개만 일부 쓰고 일부 생략, 이런 거 절대 하지 말고 알고 있는 주요 키워드는 무조건 다 쓰고 본다.
4. 문제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라.
너무도 당연하고 기본적인 이야기이지만, 지키지 않는 학생이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A에 대해서 B와 C를 중심으로 논하라"는 문제가 제출되었을 때, A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쏟아내는 데 정신이 팔려 B와 C를 중심으로 논하라는 요구를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아무리 답안을 길게 작성해도 감점 요인이 된다. 물론 B와 C 이외의 것들을 동원해 A를 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출제자가 요구한 대로 B와 C를 중심으로 논한 후 플러스 알파로 활용해야 가산점의 여지가 있는 것이지, 주객이 전도되면 좋을 게 전혀 없다. 문제를 꼼꼼하게 읽고서 출제자가 시키는대로 하라.
5. 남들과 구별되는 개성을 부여하라.
답안을 채점하다 보면 그 천편일률적인 모습에 질리게 된다. 정말 지루하다. 따라서 채점자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개성 있는 서술을 넣어 주는 게 좋다. 적어도 답안의 도입부나 끝부분은 본인의 시각이나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문장들로 구성해 주는 게 좋고, 해당 주제에 대해 수업 시간에 배운 것 외의 내용들을 추가해 주면 더욱 좋다.
시험 공부를 할 때 교수가 제공하는 강의안이나 노트필기한 것만 달달 외울 것이 아니라 핵심 주제를 몇 개 뽑아 다른 학자가 쓴 개설서에서 해당 주제에 관한 부분을 찾아서 가볍게 후루룩 읽어 두면 좋다.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더라도 다른 학자가 다른 문장으로 구성해 서술한 것을 읽어 두면 다른 학생들과 판박이처럼 똑같은 문장으로 서술하는 것을 피할수 있다. 그것만으로 훌륭한 플러스 요인이다.
6. 자신이 수업 내용을 충실히 소화했다는 것을 과시하라.
채점자가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매우 소박하다. 수업을 성실하게 제대로 소화하였는가가 제1의 평가 목표이다. 논술형이라고는 하지만, 학생이 경천동지할 파천황적인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차근차근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만 잘 정리해 제시해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때로는 그런 틀에 박힌 답안 작성에 거부감을 가진 학생들이 자신만의 개성 넘치고 독창적인 서술을 하겠다고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러한 태도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수업의 내용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강하게 제시하더라도 그 전에 우선 수업 내용을 충분히 소화하였다는 것부터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채점자로서는 이 학생이 지금 수업도 안 듣고 대충 말발로 때우려 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감점제 채점 방식에 따르더라도 이러한 답안은 결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7. 구체적인 전문용어나 연도를 활용하라.
두루뭉실한 답안만큼 안 좋은 것도 없다. 서술 대상에 대해 대충 윤곽만 파악해 쓰는 글은 명쾌함이 떨어져 채점자에게 안 좋은 인상을 준다. 구체적인 전문용어나 연도 등을 문장 중간에 몇 개 섞어 주는 것만으로 글에 날카로운 이미지가 부여되고 채점자에게 신뢰감과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선조는......"이라는 문장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선조는......"으로 서술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러니 중요한 용어나 인물명, 연도 등은 단 몇 개라도 미리 외워 뒀다가 써먹는 게 좋다. 연도 외우는 게 참 쓸 데 없는 짓 같지만, 연도를 외워 사건의 선후관계를 파악해 놓으면 체계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을 뿐더러 남들 귀찮아서 안 외우는 걸 외웠다는 걸 어필하면서 채점자에게 열심히 공부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좋다.
8. 편지는 의미가 없다
가끔 답지에 구구절절하게 시험 공부를 하지 못한 사연을 쓰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 걸로 마음이 움직이는 채점자는 없다. 그냥 백지를 내거나 '죄송합니다'라고 한 줄 쓰고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