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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와 이덕일의 기회주의적 줄타기

by kirang 2015. 10. 22.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전국이 시끄러운 와중에 유독 입을 다물고 조용해진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이덕일. 최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만권당)라는 책을 내고 각종 매체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하며 한국 역사학계를 '매국적 식민사학'이라 맹비난하던 기세는 어디가고, 그답지 않게 말을 아끼고 있다. 최근 그가 국정화와 관련해 입장을 밝힌 것은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다음 칼럼 정도이다.

"한국일보" 2015년 10월 15일, [이덕일 천고사서] 국사 서술

(http://www.hankookilbo.com/v/5bde8bf044da4c86bb6bafc9840ab8c4)

  하도 국정 교과서 문제가 이슈이니 한 번 다루기는 해야 할 상황이었나 보다. 그런데 별로 의욕이 없어 보인다. 칼럼 내용을 보면 요즘 논란과는 별 상관도 없는 옛날 책들에 대한 이야기로 지면 대부분을 때운 후, 뒷부분에서는 뜬금 없이 이번 국사 교과서 논란에서 왜 현대사만 부각되고 있느냐며 고대사에 관심을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국정이 옳은가 검인정이 옳은가하는 핵심 논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의견을 밝히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간다. 칼럼 마지막에 "역사를 체제 유지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국정 체제의 북한과 닮아가고 있지 않은지 비춰봐야 한다."는 문장을 덧붙이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맥락 없이 마지못해 툭 끼워 넣은 수준이라 하는 역할이 없다. 한 마디로 면피용이다.

  이덕일이 이처럼 소극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데 있다. 사실 이덕일은 요 몇 달간 동북아역사재단을 신나게 때리며 재미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이덕일이 날뛰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은 국회의 동북아역사왜곡특위이다. 여기 소속된 국회의원들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할 것 없이 이덕일에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그걸 믿고 호가호위하며 동북아역사재단이며 역사학계를 '매국', '친일', '식민사관' 따위의 선동적인 단어로 몰아붙이며 스스로를 논란의 중심으로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논란을 소재로 책을 출간해 부가 수입을 얻는 것은 보너스. 그런데 상황이 일변하였다.

  박근혜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선언하자 역사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블랙홀처럼 '국정화 문제'로 빨려 들어갔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형 사고를 치니 일개 책팔이인 이덕일 따위는 태풍을 만난 나뭇잎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가 몇 달 동안 뿌려댔던 '떡밥들'은 순식간에 쓸려 내려갔다.

  그렇다고 이덕일이 박근혜를 직접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던 자신의 '서포터즈', 새누리당 국회의원들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릴 수가 있다. 반대로 대놓고 국정화를 옹호하며 새누리당 편을 들면 이제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들과의 관계가 망가진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확보해 놓은 인적 자산이 반토막이 나게 생겼다. 그러니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묘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전형적인 양다리이다.

  더 나아가 이덕일은 국정화된 국정 교과서 편찬 사업에 자기도 한 자리 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이덕일은 올해 초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바 있다.

"내일신문" 20150209, [인터뷰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식민사관 학자들이 국정교과서 밀어붙여"

(http://www.naeil.com/news_view/?id_art=138759)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이 거의 0에 달하자 식민사관 학자들이 나선 것으로 보인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하는냐, 검인정으로 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역사 교과서를 누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나가느냐 하는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 주문대로 ‘균형 잡힌 교과서’ ‘믿을 수 있는 역사교과서’가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정통성과 객관성을 담보한 역사책이라면 국정화로 하다가 검인정으로 가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 다만 우리역사의 관점의 차이를 얼마나 좁히고 팩트에 근거해 정확하게 기술해 내느냐의 문제다."

  교과서 국정화에 비판적인 듯한 모습을 살짝 보이다가 결국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을 바꾼다. 이덕일 말에 따르면 '좋은 국정화'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좋은 국정화'는 이덕일 자신의 주장을 실어 주는 국정화를 말한다.

  위 인터뷰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덕일이 교과서 국정화의 책임을 은근슬쩍 '식민사관 학자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다는 것이다. 뭐, 이덕일이 언제는 안 그랬던가. 이 세상에 안 좋아 보이는 건 죄다 식민사학자들 책임으로 돌려 왔던 터이다. 그런데 그의 계산과 달리 뜻밖의 모습이 연출되고 만다. 전국 대다수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들이 국정 교과서 전환을 반대하며 속속 집필 거부를 선언해 버린 것이다.

  이덕일은 그동안 역사학계 대다수가 '친일 식민사학자'라고 외쳐왔다. 그리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도 식민사학자들이 나선 것이라고 뒤집어 씌웠다. 이덕일이 제시한 세계관대로라면 전국 사학과에 포진한 '친일 식민사학자'들은 대거 국정화에 찬성해야 한다. 하지만 어쩌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당장 이덕일이 악의 축으로 몰아온 서울대학교에서조차 역사 관련 학과 교수 대다수가 국정화 반대 성명서에 서명을 하고 정부를 비판하였다. 이덕일의 망상적 세계관은 파탄이 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처럼 떠들어 봤자 자기만 궁색할 뿐이니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한 이상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막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연 국정 교과서 편찬에 이덕일이 끼어들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현 국사편찬위원장인 김정배는 그 자신이 고대사 전공자이니만큼 이덕일이 대변하는 사이비 역사학의 실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대충 구슬러서 사기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다만 역사학계에서 대거 집필 거부를 표명한 마당인지라, 외부 인사와 타전공자들을 폭넓게 수용하여 교과서를 집필하겠다는 식의 발언이 몇 차례 나온 상황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이덕일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국회의원 내지 고위 공직자들이 압력을 넣으면 이덕일이 자문위원이라든지, 편찬 소위원회라든지 하는 곳에 끼어들어가 교과서 편찬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국정화 교과서의 성격이 '친일, 독재 미화'가 될 것이라는 식의 정치적 공격을 받고 있는 만큼 여당 쪽에서는 근현대사 분야에서의 논란을 희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사 분야 서술에 쇼비니즘적 요소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당장 교과서에 근현대사 비중을 줄이는 대신 고구려사의 비중을 늘리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국정화된 한국사 교과서 편찬 작업에 이덕일과 사이비 역사학이 파고들 틈새는 충분히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