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경선을 통해 안희정은 적지 않은 정치적 자산을 잃었다.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는 데는 성공했는지 모르겠지만, 욕심을 버린 행보를 보였다면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던 훨씬 많은 것들을 스스로 걷어차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몇 마디 적어본다.
몇 년 전인가 안희정의 인터뷰 동영상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정치는 정도를 따라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였는데, 예로 든 것이 본인이 산 속에 있으면 잘 안보이지만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산 속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뻔히 다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기 객관화에 대한 깨달음이 있는 정치인이구나 싶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요즘 안희정의 행보를 보면 과거 자신이 한 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라 씁쓸한 마음이 든다.
안희정이 대중들에게 크게 비판을 받게 된 계기는 '선의'와 '대연정' 발언이었다. 나는 안희정이 했던 '선의' 발언이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정론이라 본다.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상대가 아무리 싫어도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상대방의 의도를 악으로 규정한다면 대화 자체가 불가하다. 나 혼자 하는 정치가 아닌 이상 100% 내 뜻에 맞지 않더라도 양보할 것은 하고, 얻어낼 것은 얻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타협과 절충의 첫걸음은 상대가 하는 주장의 선의를 인정해 주는 데서 시작된다.
그럼에도 안희정의 발언이 사람들의 큰 반발을 산 것은 또 다른 맥락에 '선의'라는 개념이 얹혔기 때문이다. 바로 '대연정'이다. 이것은 명백한 안희정의 실착이다. 그냥 '친박이나 새누리당 세력과도 대화와 타협의 시도를 멈추지 않겠다'는 정도에서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가 안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대연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대연정은 상대와 정치 권력을 공유하겠다는 이야기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분노하고 적폐를 바로잡겠다고 몇 달간 추운 길바닥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서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의 발언이 아니다. 반발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안희정은 '21세기 통섭' 정신을 운운하며 대연정이 자신의 소신임을 주장하였다.
나는 안희정의 '대연정' 발언이 숙고의 결과물이라 생각지 않는다. 실상은 그냥 별생각 없이 '멋을 부린' 말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까 박근혜가 떠드는 '창조경제'나 '대통합' 같은 두루뭉술한 표현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수사'가 아닌 실질적인 권력 분배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가장 바람직했던 대응은 오해가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자신의 본의는 끝없는 정치적 대립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치의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었다고 해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희정은 이를 '수준 높은' 정치적 식견으로 포장하려 들었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많은 야권 지지자들은 이제 저 사람이 대체 뭐하자는 사람인가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율 2위권에 안착한 이후 안희정은 문재인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최근 토론회에서 문재인이 군인 시절 전두환으로부터 받은 표창에 대해 언급한 것을 가지고 공격을 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건에 있어 안희정 캠프가 취한 태도는 무척 억지스럽고, 한편으로는 비열한 측면이 있다. 누가 보아도 이는 광주 민심을 자극하여 문재인에 대한 비토 여론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이다. 대선 주자 경선 과정에서 후보 상호간의 공격과 비판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비판에도 격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광주에서의 비극을 이런 식으로 비틀어서 이용해 먹어도 되나. 애초에 이명박이나 박근혜의 정책에 대해서도 '선의'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사람이 정작 자기당 동지의 발언을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정치 공세를 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어제 안희정은 페이스북에서 "문재인 후보와 문재인 캠프의 태도는 타인을 얼마나 질겁하게 만들고 정 떨어지게 하는지 아는가.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것이 목표라면 성공해왔다"고 비판하였다. 안희정은 자신에 대한 야권 지지자들의 비판을 단지 문재인 캠프의 공격과 선동 탓으로 여기는 듯하다. '산 속에 들어간 안희정'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해서 볼 수 없는 모양이다. 그에 대한 비판이 문재인 캠프가 아닌 산 밖 먼곳에서 전체 그림을 보고 있는 이들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안희정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척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성품인 것 같다. 신경줄이 가늘다고 해야 할까. 평생 칭찬만 듣고 살아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도련님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앞으로 험악한 중앙 정치, 전국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맷집을 키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가 대연정과 선의에 기반한 이해의 대상으로 설정했던 범새누리 계열의 정치 집단은 안희정 본인이 '정 떨어지고 질린다'고 비판한 문재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저열하고 무지막지한 정치 공세를 펼치는 자들이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