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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과 잡담

인어공주 실사화 캐스팅 논란과 PC함에 대한 단상

by kirang 2019. 7. 7.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인어 공주"의 캐스팅을 발표했는데, 주인공 역을 맡은 인물이 흑인이라는 점이 논란이 되고 있다. 캐스팅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은 모양이다. 이들 중에는 "인어 공주"의 원작이 덴마크라는 점을 들어 흑인 인어 공주는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디즈니는 공식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덴마크 사람 중에도 흑인이 있으니, 덴마크 인어도 흑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디즈니의 결정을 옹호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에게 인종 차별의 혐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인터넷을 보면 실제로 본 사건과 관련해 인종 차별적 발언을 내뱉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 글에서는 이들에 대해 논외로 하겠다. 두말 할 것 없이 저급하고 부도덕한 행위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생각해 볼 문제는 흑인이 캐스팅 된 데 불만을 갖는 것을 '편견이자 인종차별적 사고'라고 규정해버리는 'PC(정치적 올바름)적 태도'가 전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덴마크 사람 중에도 흑인이 있다 운운하는 디즈니의 발언은 말장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인어야 어차피 상상의 존재이니 흑인 인어를 설정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이번에 캐스팅 논란이 일고 있는 영화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이 지은 원작 소설을 실사 영화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1989년 디즈니가 제작한 바 있는 애니메이션 작품의 실사화 작품이라는 게 문제다. 당연히 원작 애니메이션을 얼마나 비슷하게 실사로 연출하였는지가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또다른 기대작인 "라이언 킹"의 예고 영상에 대한 반응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캐스팅은 과거 애니메이션 "인어 공주"의 주인공인 에리얼의 외모를 송두리째 부정하였다. 원작 팬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에리얼의 팬들이라면 디즈니가 PC함을 과시하여 회사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목적으로, "인어 공주" 에리얼의 캐릭터를 버리고 희생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흑인은 공주가 되면 안되냐'는 식의 발언은 논점 이탈이다. 그간 흑인 공주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앞으로 매력적인 흑인 공주가 등장하는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면 되는 것이지, 굳이 기존에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던 에리얼의 캐릭터 설정을 파괴할 필요가 있었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에리얼이 '인간 공주'가 아니라 '인어 공주'였기 때문에 정치적 딜의 대상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디즈니의 수많은 공주들 중 흑인 TO를 하나 만들어야 한다면 그래, 인간이 아닌 인어 하나를 내 주는 정도로 타협하자고 생각했을 법하다. 

  다른 사례로 바꾸어 사고 실험을 해 보자. 예를 들어 '그린 게이블스의 앤'을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앤을 빨간 머리에 빼빼 마르고 창백한 여자아이가 아니라 흑인 여자 아이로 캐스팅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원작에서는 남자 아이를 원했다가 착오로 여자 아이가 오게 된 것이 이야기의 발단이 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백인 아이를 원했는데, 흑인 아이가 오게 된 것을 이야기의 첫번째 갈등 구조로 설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흥미로운 변주일 수 있으리라 본다. 다만 오랫동안 원작 앤의 캐릭터를 사랑해 왔던 기존 팬들 입장에서는 '이건 나의 앤이 아니야'라고 느낄 수 있고, 이는 당연하다. 캐릭터라는 것은 단순한 역할 뿐 아니라 그의 외모와 말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C함이라는 것은 윤리와 도덕을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편견과 폭력을 교정하는 순기능을 하는 것도 맞다. 다만 PC함이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하는 장신구 역할을 하는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이건 일종의 나르시시즘이다. 더구나 자신의 '숭고하고 도덕적인 의도'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간단하게 '편견에 찌들고 미개한 사람들'로 재단한다면, 이건 또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영화가 잘 만들어지고, 배우의 연기와 노래 또한 출중하여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다면, 이번 캐스팅 논란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크게 성공할 수록 붉은 머리카락과 흰 피부를 가진 애니메이션의 에리얼 캐릭터는 묻혀지게 될 테니, 원작 캐릭터의 팬들이 느끼는 상실감은 더 커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가 망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건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이다. 당연히 주연 배우 캐스팅 문제가 가장 크게 비판받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배우 입장에서는 '도전'이라고 기꺼이 응했을 수 있겠지만, 나는 태생이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그런지, 굳이 영화 외적으로 배우에게 이러한 부담을 지우는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