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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장수왕, 한 세기를 지배한 고구려 전성기의 군주

by kirang 2017. 2. 6.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평양 진파리의 전동명왕릉

1. 새로운 왕의 등장과 평양으로의 천도

  장수왕(長壽王)은 고구려의 제20대 왕이다. 이례적으로 긴 수명을 기록하여 장수왕이라는 왕호를 받았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거련(巨連)이다. 중국측 사서에는 이름이 연(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외교 시 사용하던 중국식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체격과 용모가 뛰어났으며 뜻과 기운이 호방하고 컸다고 전한다. 408년(광개토왕 18) 태자가 되고, 412년 광개토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지 3년째 되는 414년에 예법에 따라 부왕(父王)의 능을 조성해 시신을 모시고, 거대한 광개토왕비를 세워 그 훈적을 기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장수왕의 업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의 천도이다. 그런데 이는 장수왕 혼자만의 결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평양 지역은 본래 낙랑군의 중심지로서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곳이었다. 때문에 313년 미천왕에게 복속된 이래 고구려 왕실로부터 꾸준히 중시되었던 곳이다.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국원왕은 평양에서 백제와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고, 광개토왕 역시 평양에 절을 세우거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이곳은 남진 경영의 전진 기지로 이용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왜(倭)의 공격을 받던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보낸 사신이 광개토왕을 만난 곳도 평양이었다.

  고구려의 영역이 확장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어 갈수록 국내성 지역은 도읍으로서 한계를 노정하였다. 국내성 지역은 압록강변에 위치한 분지 지형이다.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농업 생산력과 교통에 있어서 일정한 제약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고구려 초기부터 성장해온 귀족 가문들의 근거지라는 점에서 강력한 집권을 추구하는 왕실에 부담을 주었다. 고구려 왕실은 국가 체제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천도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평양 지역에 대해 고구려의 왕들이 지속적으로 보인 관심과 조치들은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전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427년(장수왕 15) 마침내 천도가 단행되었다.


2. 장수왕의 정치 개편

  평양으로의 천도는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 같지 않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사료는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北魏)에 보낸 외교 문서이다. 개로왕은 474년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군사적으로 압박해 주기를 요청하면서 장수왕이 죄를 지어 나라는 어육(魚肉)이 되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 내용은 본래 『위서』 백제전에 실려 있는 상표문의 내용을 『삼국사기』에 옮긴 것이다. 개로왕은 이 글에서 북위의 힘을 빌리기 위해 고구려에 대한 험담으로 일관하고 있다] 외교 문서의 목적상 과장이 섞여 있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장수왕대 고구려 내부에 일정한 정치 변동이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천도를 통해 왕권의 절대화를 추구한 장수왕과 국내성을 기반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귀족 세력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장수왕이 모든 귀족들을 적으로 돌렸던 것은 아니다. 천도를 통해 왕과 밀착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귀족들은 오히려 왕의 친위 세력이 되었을 것이다. 평양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흥 귀족들이 그들이다. 고구려에는 낙랑계로 보이는 왕씨(王氏) 성을 가진 고위층 인물들이 보이는데, 고구려 승려 의연(義淵)을 북제(北齊)의 승려 법상(法上)에게 파견한 고구려 대승상(大丞相) 왕고덕(王高德)이나,거문고를 만들었다고 전하는 고구려의 둘째 재상 왕산악(王山岳)이 바로 그들이다.[왕산악이 언제 인물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진(晉) 나라에서 온 칠현금을 연주하는 방법을 몰라 난감해 할 때 홀로 나서 이를 개조하고 100여 곡을 지어 연주했다고 하는 점을 보면 중국계 문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장수왕은 새로운 귀족층을 친위 세력으로 삼고 옛 귀족층을 숙청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구상한 정치 체제 개편을 관철하였다.


3. 장수왕의 외교 정책 

 『삼국사기』 장수왕대의 기록을 보면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중국과의 조공(朝貢) 기사이다. 대부분 북위에 대한 조공 기사이며, 간혹 남송(南宋)이나 남제(南齊) 같은 남조의 국가들에도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였다. 장수왕대에 조공 관계 기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 남아 있던 고구려의 자체 기록이 매우 소략한 데다 그나마 중국 사서에 남아 있는 고구려 관련 기록이 대부분 조공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장수왕의 재위 기간이 길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조공 기사의 수가 많은 것은 그만큼 고구려의 외교 활동이 활발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수왕이 펼친 외교는 등거리 외교로서 매우 주체적이며 당당한 것이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이웃 나라인 북연(北燕)의 멸망 시 고구려가 보여 준 대처이다. 436년(장수왕 24) 북위의 공격으로 북연이 망할 위기에 빠지자 장수왕은 발 빠르게 장수인 갈로맹광(葛盧孟光)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 수 만 명은 북위군보다 한발 앞서 북연의 도읍인 화룡성(和龍城)에 진입하여 무기고와 성 안을 약탈하고, 북연왕 풍홍(馮弘)과 백성들을 호위해 고구려로 철수하였다. 눈앞에서 북연 왕을 빼앗겨 분개한 북위는 고구려에 항의를 하고 군사적 공격까지 검토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였다. [북연은 407년 후연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시작된 국가이다. 첫 임금은 고구려계인 고운(高雲)이었으며 고구려와는 유화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북위의 공격으로 도성이 함락되기 1년 전부터 이미 사신을 보내 일이 급할 경우 고구려로 망명할 것임을 밝힌 바 있다. 장수왕의 군대 파견은 이러한 배경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로 넘어온 풍홍은 자신을 대하는 장수왕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남송(南宋)으로의 재망명을 꾀하였다. 남송에서는 풍홍을 맞이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 고구려에 비용을 대라고 요구했으나, 장수왕은 사람을 보내 오히려 풍홍과 그 자손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남송의 사신이 자신이 끌고 온 군대를 동원해 풍홍을 살해한 고구려 장수를 습격해 죽이는 일이 발생했는데, 장수왕이 이를 붙잡아 남송에 송환하자 남송 측에서도 고구려의 뜻을 존중하여 한동안 그를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다.

  장수왕은 북위나 남송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는 입장이었으나, 실제로는 전혀 그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지닌 실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장수왕대 고구려의 외교적 위상은 489년(장수왕 77) 남제의 사신이 북위에 갔다가 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는 대우를 받아 항의를 했던 사례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남제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북위와 남제에 모두 사신을 보냈는데 세력이 강성해 어느 쪽의 제어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북위에서는 여러 나라 사신들의 관저를 둘 때 남제 사신의 관저를 가장 크게 하였고 고구려는 그 다음의 규모로 하였다.]


4. 고구려의 남진과 백제 왕도 한성의 함락        

  장수왕은 475년(장수왕 63)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이 군사 행동은 바로 1년 전인 474년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대한 군사 공격을 종용한 것에 대한 응징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개로왕은 북위가 고구려를 공격해 주기를 바랐지만, 북위 입장에서는 그러한 위험과 부담을 짊어질 이유가 없었다. 개로왕의 시도는 오히려 소식을 전해들은 고구려의 분노를 사는 부작용을 낳았다.

  백제의 왕도인 한성(漢城)을 포위한 고구려군은 군대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성문에 불을 질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개로왕은 수십 기의 기병만을 이끈 채 도주하다가 결국 붙잡혀 살해당했다. 목적을 달성한 고구려군은 백제의 백성 8,000명을 포로로 잡고 귀환하였다. 이로서 한성 백제 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왕과 도읍을 잃은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떨어진 훨씬 남쪽 지역의 웅진(熊津)을 새로운 왕도로 삼고 재기를 노리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흔히 남진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고구려가 천도를 한 시점이 427년이고, 백제 한성 공략이 475년의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천도와 남진 정책을 연결시키기에는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더구나 장수왕은 479년 유연(柔然)과 모의하여 서북방의 유목 국가인 지두우(地豆于)에 대한 군사 활동 및 분할 점령을 시도하기도 하였다.[고구려의 지두우 분할 시도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사료상에 명확하게 전하지 않는다. 다만 거란이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해 대규모로 북위에 복속하는 양상을 보면 이 일대에서 고구려가 강한 군사적 압박을 가하였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모습을 남진 정책이라는 인식 틀로 묶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장수왕은 491년(장수왕 79)에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98세. 아들인 조다(助多)는 이미 사망하였고, 손자인 문자명왕(文咨明王)이 뒤를 이었다. 장수왕의 사망 소식을 들은 북위의 효문제(孝文帝)는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입은 채 동쪽 교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며 한 세기 가깝게 강력한 왕국을 통치하며 주변국에 존재감을 과시하였던 거인(巨人)을 기렸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왕처럼 군사력을 동원한 화려한 정복 전쟁을 선호한 군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토는 더욱 늘어났고, 나라는 부강해졌다. 장수왕은 고구려를 한층 성숙한 나라로 이끈 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