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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책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by kirang 2011. 3. 3.


김용만 (지은이) | 바다출판사 | 2003-10-20
 
다른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대출했다. 과연 얼마 되지도 않는 연개소문 기록으로 '전(傳)'이라는 형태의 책 한 권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소설가가 쓴 책이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저자는 고구려사를 전공해 학위까지 받은 소장학자였다. 최근 미시사 계열의 이야기체 역사서술 방법론에도 관심이 있던 터라 이 책이 한국사학계에 이야기체 방법론을 도입한 사례가 될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전공자답게 사료의이용 등에 있어서는 전문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사고의 틀이 너무 평면적이다. 다음은 저자가 본문 중 연개소문을 평한 부분이다. 그의 시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고 판단되어 옮겨 본다.


  연개소문의 행동이 정변, 쿠데타, 아니면 혁명인가라는 용어 정의가 굳이 필요하다면, 필자는 이를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정변은 권력층 내부의 변혁을 의미하며 1884년 김옥균이 주동한 갑신정변과 같은 사례가 있다. 반면 혁명은 지배체제 전체를 변혁시켰다는 점에서 정변과 구별된다. 혁명은 한 나라 또는 한 체제가 지속적으로 유지해가는 과정에 제동을 걸어 새로운 상황을 전개시키는 것을 본질로 한다. 연개소문의 집권 이후 고구려의 지배적인 사회질서와 정치질서에는 커다란 변화가 왔다. 물론 왕권이 지속되고, 경제적 측면의 구체적 변화를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대외정책이 정반대로 바뀌고 그에 따른 사회 질서가 크게 변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그의 행동을 갑신년의 정변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의 행동을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의 권력욕에 의해 권력 찬탈을 목적으로 한 쿠데타로 규정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의 행동에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고, 고구려인의 지지도 충분히 얻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폭압에 의한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정권을 잡은 지 불과 2년 6개월도 안되어 시작된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인의 일치단결을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수십 년에 걸친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50쪽

  저자는 '혁명은 좋은 것', '쿠데타는 나쁜 것' 정도의 피상적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과연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구분되는 체제변혁자였던가. 아무리 봐도 외교 정책과 연개소문 1인에 대한 권력집중을 제외하고는 기존 체제와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연개소문의 집권으로 고구려의 신분 체제에 변화가 발생했던 것도 아니고, 국가 전체의 생산 방식에 혁신이 생긴 것도 아니다. 이를 혁명이라 주장하는 것은 박정희가 일으킨 5.16쿠데타를 혁명이라 지칭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따지고 보면 저자가 '정변'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던 갑신정변이야말로 그 주동자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회 변혁의 정도로 봤을  때 연개소문의 그것보다 혁명의 시도에 가까웠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성공하지 못했을 뿐.

  폭압에 의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오랜 기간 유지한 독재자는 수도 없이 많다. 연개소문이 수십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했음을 근거로 그의 행위를 '혁명'이라 주장한다면 아프리카의 수많은 군사독재자들도 혁명가로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궁색하다.

  대국 당나라와 맞서 한 판 싸움을 벌인 일대 영웅! 민족의 자존심! 이런 틀로 연개소문을 규정하려 드니 무리수가 나오는 게 아닐까. 연개소문 집안은 왕실 및 타 귀족들과 권력 다툼을 벌이는 갈등 관계에 있었고 연개소문의 대에 이르러 그 갈등이 폭발하며 대규모 살육이 벌어졌다. 사서에는 왕과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숙청하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이 선수를 친 것이라고 하는데, 이 기록을 믿는다면 연개소문은 그저 ' 자기가 살기 위해' 정변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은 대중적인 글쓰기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역사 교양 도서다. 그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흔히 이야기되는 '전공자들이 대중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말은 기술적인 방법론에 대한 주문이지 사고 수준까지 대중들에게 맞춰 주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전공자라면 대중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역사 이면의 의미들을 재해석해 제시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