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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대한 리뷰

영화 "명량"

by kirang 2014. 8. 15.


2014년 개봉한 김한민 감독, 최민식 주연의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순신 이하 장수들이 입고 있는 조선군 갑옷이다. 이 정체 불명, 국적 불명의 갑옷은 무엇인가. 임진왜란 때라면 고증할 자료가 없는 것도 아니건만, 왜 그런 괴상한 갑옷들을 입혀 놨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순신은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가슴팍에 이상한 무늬까지 박아 넣었다. 시작부터 이런 것에 시선을 빼앗기니 배우들의 연기까지 다 가짜로 보이는 부작용이 있다. 

영화는 전쟁을 준비하는 전반부와, 본격적인 해전을 묘사하는 후반부로 구분된다. 짐작컨대 전반부는 전력의 절대적 열세로 인한 공포와 좌절감 등 등장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하고, 후반부의 스펙타클한 전투 장면에서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나쁜 생각 같지 않다. 하지만 실제 결과물을 보면 원래 의도대로 영화 연출이 잘 수행되었는지 의문이다.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체로 깊이감이 없다. 모두가 평면적인 인물들이고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적당히 기능적으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 보니 등장 인물들의 내면으로 깊숙히 침잠해 관조해야 할 전반부의 내용은 그다지 볼만한 게 없다. 어차피 들어갈 수 있는 내면 공간 자체가 없으니까. 이순신의 특별함도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도망치는 병사의 목을 베는 것? 출정하기 전날의 연설? 이순신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부하들이 이 출정은 불가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제대로 된 대답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공포와 불안감이 가장 큰 적이라면, 이 난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부하들을  설득하고 공포감을 줄이는 것이 장군의 역할이 아닐까.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순신은 계속 말이 없고 그의 깊은 뜻은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는 이게 사기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순신이 한밤 중에 먼저 죽은 동료들의 유령을 만나 울부짖으며 술을 권하고, 습격을 당하고, 거북선이 불타는 장면이다. 산발을 한 채 귀신들을 부르며 절규하는 이순신은 "맥베드"나 "카게무샤"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그다지 톤이 맞지 않는다. 최민식은 절절하게 연기를 하지만 이 영화와는 별개의 모노 드라마 같은 인상을 준다.

본격적인 해전이 묘사되는 후반부에 들어 가도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전술적 특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조류가 어떻고 회오리가 어떻고 하는 대사들이 나오지만 이를 시각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명쾌하게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냥 설정이 그러하니 적당히 이해하라는 식이다. 다만 전투 시 배가 파괴될 때의 현실감이나 CG 표현 같은 기술적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 같다.

영화 "명량"에서는 전투의 승리가 이순신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이름 없는 백성들과 군졸들의 힘이 더해진 결과였다는 해석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노를 젓는 격군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 자폭선의 존재에 대한 백성들의 눈물겨운 신호, 최후의 순간 회오리에 빠진 이순신의 대장선을 직접 구출하는 백성들...... 얼핏 생각하면 명분도 그럴듯하고 새로운 접근인 것 같기도 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구태의연하고 얄팍한 해석이며, 드러내는 방식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회오리에 빠진 이순신의 배를 구출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너무 작위적이어서 좋지 않은 의미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이다. 

사실 이러한 연출은 관객에 대한 낯뜨거운 연가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바닷가 바위에서 바라보는 백성=자신'라고 동일시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작은 어선들을 몰고 가 회오리에 말려든 거대한 군선을 건져내는 장면을 보면서 그 비현실성을 문제 삼기보다는 스크린 밖에 있는 자신이 직접 영화에 개입해 이순신을 구해내기라도 한듯 뿌듯한 기분에 빠지는 것이다. '백성에 대한 충성'을 운운하는 것이나 '백성이 바로 천행' 운운하는 이야기나 모두 관객에 대한 서비스용 발언들. 한마디로 낯이 간지러운 대사들이다.

논리적으로 가장 납득하기 힘든 장면은 자폭선 씬이다. 자폭선에 타고 있던 조선의 정탐병과 해변 바위 위 아내의 커뮤니케이션은 그야말로 미스터리이다. 초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배 위에서 독백하고 있는 남편의 의중을 알아채고 치마를 벗어 신호를 보내는 아내의 모습은 어떻게든 그 장면을 넣고 싶어서 논리적인 설명을 포기한 채 만들어낸 억지스러운 전개라고밖에 할 수 없다.

선상에서의 백병전 장면도 문제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장점은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대포의 운용이었고, 백병전은 전술적으로 가장 기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대장선 내에서의 백병전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며,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명량"에서는 도선 이후의 백병전이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묘사된다. 그리고 급기야 내가 가장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장면이 등장하고 만다. 우리나라 사극의 고질적인 병폐인 최고 지휘관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적들을 이리 베고 저리 베는 장면. 이것 역시 고증과 현실성보다는 '그럴 듯한 그림을 보이고 싶다'는 의도에서 나온 무리한 연출이다. 일본군 장군 역할을 맡은 조진웅과 류승룡은 그간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며 연기력이 검증된 좋은 배우들이지만, "명량"에서는 '이 노옴~', '이~슌~신' 같은 대사를 반복해 외치는 정도의 얄팍한 악당 역으로 낭비된다.

"명량"은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극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왕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명량에서의 전투를 영화화 하기로 했다면, 좀 더 야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알 수 없는 공백지들은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채워 넣더라도, 있는 자료만이라도 철저히 수집하여 당시 상황을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재현하고 시각화하는 것도 한번쯤은 품어볼만한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영화 "명량"에서는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명량이라는 이름을 빌렸을 뿐, 이 이야기는 그냥 영화 제작자들의 머릿속에서 마음대로 만들어낸 인물들이 펼치는 가상의 사건일 뿐이다. 비단 "명량"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대개의 사극이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3분 요리 만들듯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소모적으로 이용할 뿐 진지하고 심도 있는 접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사극 제작자들은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애정이나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는데, "명량"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덧붙임 :

 "명량"은 최단 기간 1000만 관객을 넘어 무시무시한 기세로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왜 이렇게 흥행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10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본 영화들의 면면을 보면 딱히 흥행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경우들이 대다수 아니던가. 이런 분석, 저런 분석, 다 떠나서1000만 영화는 그냥 하늘이 점지해 주시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