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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도올 김용옥이 이야기하는 고구려, 신용할 수 있나

by kirang 2016. 5. 19.

     


  도올 김용옥이 2015년 말에 책을 냈다. "도올의 중국일기"라는 제목의 시리즈물인데, 그가 연변대학에 머물며 보고 느낀 것을 일기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그중 2권과 3권은 고구려 유적 답사기라고 할 수 있다. 

  김용옥이 손석희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고구려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며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 책을 읽어보니 역시 문제가 많았다. "도올의 중국일기"에 실려 있는 고구려 관련 이야기 중 문제가 있는 것들을 몇 개 짚어 본다.


1. 장군총은 동명왕묘이다?

  김용옥은 집안에 있는 장군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장군총은 거의 완벽하게 옛 모습이 보전되어 있는데 반하여 호태왕릉은 심하게 원상을 몰라 볼 정도로 무너져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대답은 명백하다. 장군총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단단히 지반을 굳히고 정성스럽게 굵은 돌벽돌을 쌓아올렸을 뿐 아니라, 그것을 계속해서 관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장군총의 축성연대가 광개토대왕의 능묘보다 앞설 뿐 아니라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 축성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다시 말해서 호태왕의 묘가 있기 전에 장군총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장군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전통적 설대로 "상징적인 동명성왕묘"를 의미한다. 장군총은 동명왕묘인 것이다(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 타고, 몸으로 뛰면서 감지한 고대사의 진실은 경탄스러운 구석이 많다). 장군총이 동명왕묘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고구려인들의 세계인식 방법을 이해못하거나, 그 주축의 중요성을 거부해야만 하는 어떤 편견,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김용옥, 2015 "도올의 중국일기"2, 통나무, pp.283-284.

  

  고구려 왕릉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황당한 소리인지 안다. 장군총이 누구의 무덤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려 있다. 대개 광개토왕 아니면 장수왕의 무덤으로 본다. 

  중국 학계에서는 광개토왕비 부근에 위치한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고, 장군총은 장수왕릉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일본과 한국 학계에서는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데 장군총을 누구 무덤으로 보든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 장군총이 집안 지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왕릉급 무덤이라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적석총이 모두 장군총처럼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적석총은 시기별로 그 모습이 변한다. 고고학에서는 이를 유형에 따라 세세하게 편년하고 있다. 크게 무기단 적석총->기단 적석총->계장형 적석총->계단형 적석총의 순서로 인정되고 있으며, 매장부는 석곽, 석광, 석실 등으로 세분한다. 장군총은 형태상 계단형 적석총에 속하며 그중에서도 석실이 갖추어져 있는 가장 늦은 시기의 적석총이다. 이는 고구려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집안 지역의 왕릉급 무덤 중에서 석실이 갖추어져 있는 계단식 적석총은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 3기뿐이다.

  김용옥의 주장대로라면 한중일의 고구려사 전공자 거의 대부분이 "고구려인들의 세계인식 방법을 이해못하거나, 그 주축의 중요성을 거부해야만 하는 어떤 편견, 정치적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다. 김용옥이 제 아무리 대중들에게 유명한 학자라 하더라도 고구려사만을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일개 비전공자'에 불과하다. 제대로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전공'이라는 것이 가지는 권위와 무게감을 안다. 김용옥도 스스로 학자라고 칭하는 사람인데 이처럼 무모한 발언을 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김용옥은 글에서 윤명철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윤명철은 2009년 월간지 "신동아" 5월호에 실린 '장군총의 비밀(http://shindonga.donga.com/3/all/13/108450/1)'이라는 글에서 장군총이 묘가 아니라 신전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내가 보기엔 과거 김용옥이 윤명철의 이 글을 읽은 것 같다. 그렇다면 '윤명철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하는 게 아니라 '윤명철의 글을 읽어보니 그렇다고 하더라'가 더 적절한 서술이 아닐까. 여하튼 장군총에 대한 윤명철의 생각은 학계의 일반의 시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이며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 장군총은 고고학 편년상 집안 지역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조성된 왕릉급 무덤이다. 즉, 평양 천도가 있었던 427년에 가까운 시기, 5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기록상 동명왕의 사당인 시조묘가 만들어진 것은 고구려 초인 대무신왕 3년(AD 20년), 1세기 초이다. 약 4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역대 고구려왕들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했다는 기록이 대단히 많이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시조묘가 존재하는 곳은 졸본에 해당하는 지금의 요령성 환인 지역이지, 국내성에 해당하는 집안 지역이 될 수는 없다. 김용옥도 고구려왕들의 시조묘 제사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성지역으로 왔다해도 방편상 졸본으로 부를 수도 있는 것"이라며, 대충 넘어 가버린다. 주장의 엄청남에 비하면 논증은 허술하고 불성실하기 짝이 없다.


2. 고구려 장안성은 요양 부근에 있다?

  김용옥은 또 다른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더구나 평원왕은 요양 부근에 장안성이라는 새로운 전략적 수도를 개척했다(평원왕 28년에 "이도장안성"이라는 기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사가들은 이런 중대한 사실을 해석하지 않는다. 이병도가 그것을 평양으로 주석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평양으로 이도한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그것은 양원왕 8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시축한지 34년만에 옮긴 것이다). 북으로 개모성, 남으로 안시성, 서로는 요동성이 포진하고 있는 백암성의 위용을 보아도 실제로 고구려문명의 요하지역 하부구조가 얼마나 탄탄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용옥, 2015 "도올의 중국일기"2, 통나무, pp.310-311.

  나는 김용옥이 대체 어떤 이상한 책들을 읽고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지 궁금하다. 나는 고구려 멸망 당시의 도성이었던 장안성이 요양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사이비 역사가로 꼽히는 복기대 같은 경우는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지금의 요양이라는 괴설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김용옥은 그것도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김용옥이 개모성, 안시성, 백암성 등과 함께 언급하고 있는 요동성이 위치한 곳이 바로 요양 시내라는 것이다. 그럼 요동성이 바로 장안성이라는 이야기인가. 고구려 서쪽 변경의 핵심 방어선이 곧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의 수도였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지금도 평양 시내에는 고구려 때 쌓은 거대한 장안성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벽을 쌓을 당시의 간지와 공사 구간, 담당자의 이름이 새겨진 성돌도 5개 가량 발견되었다. 학계에서 장안성에 대해 연구하지 않거나 해석하지 않는 게 아니라, 김용옥이 그냥 학계 연구 동향을 모르는 것이다. 


 3. 도올 김용옥이 참고하는 책?

  김용옥이 보는 유형의 책이 어떤 것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고조선의 원래 영역은 중국의 문헌을 총체적으로 검토해보면 지금의 발해 윗쪽, 흔히 요서-요동으로 부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단군의 통치영역이나 기자, 위만이 제후로서 일정기간을 지탱한 영역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한반도 내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통념은 전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이 방면으로 가장 창조적인 업적을 낸 사람은 단국대 사학과의 윤내현 교수이다. 우리는 윤내현 교수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의 연구는 확고한 문헌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병도선생의 학문적 경지는 존경할 수 있는 측면도 많지만, 일본학자들의 의도적 선입견에 사로잡혀 중국문헌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이병도의 "삼국사기" 주석은 취할 것도 있지만 대부분 상식이하의 억설이다). 그러나 고조선은 옛부터 한반도영역 내에도 중요한 센터를 가지고 있었고, 그 중의 하나가 평양이었다.......최근에나 중국사람들이 눈을 뜨기 시작한 요녕성지역의 홍산문화라고 하는 것도 실제로 고조선문명의 일각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김용옥, 2015 "도올의 중국일기"2, 통나무, pp.306-308.

  할말이 없다. 그래도 김용옥이 책 내에서 모 종교 집단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환단고기"를 믿는 데까지 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노론 운운하는 내용이 등장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덕일 같은 사람의 책을 참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4. 여전히 일본 육군 참모부의 광개토왕비 비문 변조설을 주장?

  김용옥은 광개토왕비가 일본 육군 참모부에 의해 위조되었다고 본다. 이는 원래 재일교포 학자인 이진희가 1972년 주장한 것으로, 김용옥은 이진희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이진희의 비문 위조설은 과거 큰 논란을 일으키며 학계와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지금은 완전히 힘을 잃은 주장이다. 이는 1984년 중국 학자 왕건군(王健君)의 연구 때문이다. 

  왕건군은 집안 현지에 장기간 체류하며 비를 실측하고 관련 기록을 검토하는 한편 현지인들과의 인터뷰를 이용해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밝혀진 것은 광개토왕비에 석회가 칠해져 일부 글자가 인위적으로 수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본 육군 참모부와는 무관하며 비 근처에 살며 광개토왕비 탁본을 만들어 팔던 초씨 부자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초씨 부자는 비의 표면이 울퉁불퉁해 종이가 쉽게 찢어지고 탁본을 뜨기 곤란하였기 때문에 비 표면에 석회를 발라 편평하게 다듬고 일부 글자들은 선명히 보이도록 손을 대기도 했다. 다만 학식이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엉뚱한 글자를 만들어 넣기도 했다고 한다.

  현지 조사에 기반한 왕건군의 연구 발표를 통해 일본 육군 참모부 비문 위조설은 사실상 일단락이 되었다. 현재는 한중일 역사학계 모두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용옥은 시종일관 1970년대에나 떠돌던 일본 육군 참모부의 위조설에 기반하여 글을 서술하고 있다. 왕건군의 연구를 몰라서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 뒤 이 비석의 탁본이 계속 호사가들의 구입대상이 되면서 이 비를 탁본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고......그리고 전주한지와 같은 고품질의 고려지가 제공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비면이 불규칙한 천연의 각력응회암에 두드리는 방식의 추탁을 하면 종이가 찢겨나갔다. 그래서 온갖 비법이 개발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구질구질한 얘기이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에 대한 왕 지엔췬의 주장도 결국 다 추론일 뿐이다....

김용옥, 2015 "도올의 중국일기"3, 통나무, p.56.

  이 구절을 통해 김용옥도 왕건군의 연구 내용을 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앞에서 내가 밝힌 왕건군의 연구 내용을 일절 책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놓고 '구질구질한 얘기라서 생략'한다고 얼버무리며 넘어간다.

  물론 본인이 왕건군의 연구 내용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다. 그래도 소개는 해놓고 왜 동의하지 않는지 조목조목 반박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내용도 소개하지 않고 '구질구질하다'고 얼렁뚱땅 생략하고, 또 '다 추론일 뿐'이라고 치워버리는 것이 성실한 학자의 태도일까. 내 생각에 김용옥은 그냥 '일본 육군 참모부 비문 위조설'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때문에 이 설을 논파해 버린 강력한 반론의 내용을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 양 무시하고 언급조차 회피한 것이다. 상식적인 태도라 보기 어렵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김용옥은 자신이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도 함부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이 책에는 엉터리 견해에 기반한 오류가 무척 많이 실려 있다. 여기서 소개한 것은 일부일 뿐이다. 광개토왕비문 해석이나 석회 탁본 문제를 보더라도 김용옥의 시야는 70-80년대 연구 수준에 갇혀 있는 경향이 있고, 최근 한국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거의 참조하지 않은 채 중국 학자들의 연구만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듯한 모습이 많이 보인다. 아마 본인이 중국에 체류하며 읽은 관련 서적이 대개 중국 학자들의 것이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여기에 비전공자인 본인의 엉뚱하고 어설픈 설을 -그것도 확신에 찬 자신만만한 어조로- 가미한 수준이다.

  김용옥을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석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식을 대하는 그의 불성실한 태도를 보면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