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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노트

동명성왕 주몽, 천제의 자손임을 내세운 고구려의 개창자

by kirang 2016. 8. 9.

주몽의 출생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이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으로 전한다. 어렸을 때부터 활을 잘 쏘았는데,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 호칭이 곧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주몽 외에도 추모(鄒牟), 추몽(鄒蒙), 중모(中牟) 등의 이표기들이 있는데, 모두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이다. 이중에서도 '추모'는 5세기대 고구려인들이 남긴 금석문인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銘)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몽의 행적에 대해 남겨진 기록들을 보면 출생의 과정이나 행적에 신이한 점이 매우 많아 모두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주몽이 국가의 시조인 이상 고구려 당대에도 이미 여러 가지 형태의 윤색이 가해졌을 것이며, 후대 역사서에 그 내용이 그대로 옮겨졌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부여(東夫餘) 의 왕인 금와왕(金蛙王)이 태백산(太白山) 남쪽의 우발수(優渤水)라는 곳에서 하백(河伯)의 딸인 유화(柳花)를 만났는데, 유화는 부모의 허락 없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관계한 것 때문에 쫓겨났다고 하였다. 금와왕이 유화를 궁으로 데려오자, 햇빛이 따라다니며 유화를 비추더니 급기야 회임을 하게 되었다. 유화는 얼마 뒤 사람이 아닌 알을 낳았다. 상서롭지 않다고 여긴 금와왕이 알을 길 가운데 버렸으나 짐승들이 밟지 않고 피하고 오히려 보살펴 주기까지 하여 다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이후 알을 깨며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주몽이라고 전한다.

  이와 관련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는 다른 형태의 이야기가 전한다. 「동명왕편」은 《삼국사기》 이전에 존재했던 《구삼국사》에 실려 있던 좀 더 원형에 가까운 내용을 싣고 있는데, 해모수와 유화의 만남과 유화가 아버지 하백에게 쫓겨나는 과정 등이 훨씬 상세하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로서 신통력을 발휘하며 동물로 연달아 변신하며 하백과 능력을 겨루기도 하고, 자신을 술에 취하게 만든 하백의 속임수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도주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은 주인공인 주몽에 초점을 맞추어 해모수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대폭 생략하였고, 하백에게 쫓겨난 유화의 입술이 석 자나 되게 늘어났다는 등 괴이한 내용의 서술은 없애버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몽의 탄생 설화는 부여의 건국 설화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우선 부여의 시조 이름이 곧 동명(東明)이다. 부여의 북쪽 탁리국(橐離國)의 왕이 출타했을 때 하늘에서 달걀만한 기(氣)가 시녀(侍女)에게 떨어져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하며, 버려진 시녀의 아들을 짐승들이 해치지 않고 보살펴 주었다는 내용도 유사하다. 부여의 건국 설화를 전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후한대에 왕충(王充)이 저술한 『논형(論衡)』이다. 여기에서는 부여의 시조 동명의 출신지가 탁리국(橐離國)이라 되어 있는데, 『위략(魏略)』에서는 고리국(槀離國), 『후한서』에서는 색리국(索離國)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점들로 미루어보면 주몽의 탄생 설화는 부여 시조 동명의 탄생 설화를 고구려인들이 빌려와 나름대로 변주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주몽의 출신이 동부여인가 북부여(北夫餘)인가 하는 것도 논란이 된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동부여 출신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고구려 당대의 자료인 광개토왕릉비에는 북부여 출신이라고 새겨져 있다. 광개토왕비가 고구려인들이 직접 만든 자료라는 점, 고구려 건국 설화가 차용한 부여 건국 설화에서 시조 동명이 부여의 북쪽 탁리국 출신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주몽은 원래 북부여 출신으로 전승되다가 후대에 동부여 출신으로 변개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몽의 성장과 새로운 땅으로의 남하(南下)

  주몽은 재주가 뛰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금와왕의 일곱 아들과 함께 놀았으나 다들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를 미워한 맏아들 대소(帶素)가 주도하여 주몽을 괴롭혔다. 한번은 사냥을 나갔는데 대소 왕자 일행 40여 명이 사슴 한 마리를 잡는 동안 주몽은 혼자서 여러 마리의 사슴을 쏘아 잡았다. 화가 난 대소는 주몽을 나무에 묶어 매고 사냥한 사슴을 빼앗았는데, 용력이 뛰어난 주몽은 홀로 나무를 뽑아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는 《삼국사기》에는 없고 「동명왕편」에만 있는 내용이다.

  대소는 금와왕에게 주몽이 나라에 큰 화근이 될 것이니 제거해야 한다고 청하였지만 금와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다. 주몽은 이미 부여에서 자신이 용납되지 못할 것임을 알고 떠나고자 마음을 먹었다. 일부러 좋은 말을 선별하여 물과 풀을 먹이지 않아 야위게 하였다. 얼마 후 주몽에게 맡긴 말을 점검하던 금와왕은 대부분의 말이 모두 보기 좋게 살찐 것을 보고 기뻐하며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기지를 발휘해 준마를 손에 넣은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세 친구와 함께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그 뒤를 대소가 보낸 병사들이 추격하는 가운데 엄사수(淹㴲水)라는 곳에서 길이 막혔다. 이에 주몽이 물가에서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밝히며 도움을 요청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이 이야기 역시 부여의 동명 설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주몽이 신통력을 발휘해 건넌 곳이 엄사수(淹㴲水)라고 되어 있지만, 광개토왕비에서는 엄리대수(奄利大水), 「동명왕편」에서는 엄체수(淹滯水), 『삼국유사』에서는 엄수(淹水)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강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되어 있지만, 부여의 동명 설화에도 엄사수(掩㴲水)가 등장하는 이상 실제 강과 연결시켜 비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추격병을 따돌리고 위기를 넘긴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이라는 곳에서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默居)라는 인물들을 만나 부하로 삼았다. 새로운 인물들의 합류로 주몽이 이끄는 무리는 점차 규모를 키워나갔다. 마침내 졸본천(卒本川)에 이른 주몽은 땅이 기름지고 풍광이 수려한 것을 보고 정착하여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나라를 만들고 왕이 되다

  새로 세운 나라 이름은 고구려라 하였다. 왕실의 성(性) 또한 나라 이름에서 따 고씨(高氏)로 명명했다. 기원전 37년의 일로, 이때 주몽의 나이 22살이었다. 일설에는 주몽이 다다른 졸본 땅에는 이미 나라가 있었는데, 왕에게 아들이 없어 자신의 딸을 주어 후계자로 삼았다고도 한다.

  고구려 건국 이후 사방의 세력들이 와서 복속하였는데, 송양왕이 다스리는 비류국(沸流國)만은 이미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된 나라여서 만만치 않았다. 송양왕(松讓王)은 스스로를 선인(仙人)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신생국인 고구려에게 부속국이 될 것은 권하였다. 또한 주몽의 재주를 시험하기 위해 활쏘기 시합을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활쏘기의 명수인 주몽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송양왕은 이후에도 계속 주몽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은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그런데 그 과정을 묘사한 「동명왕편」의 기록이 흥미롭다. 주몽이 사슴을 거꾸로 매달고 하늘에서 비를 내리도록 주술을 부려 비류국의 도읍을 물에 잠기게 해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이는 천제와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주몽의 신성성을 나타내는 한편, 그의 주술사적 면모를 나타내는 전승이기도 하다. 형태가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가뭄이 들면 무당들을 뙤약볕 아래 세워두는 방식으로 괴롭혀 비를 내리게 하였다. 하늘과 연결된 존재를 괴롭혀 원하는 것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주몽은 군사 활동을 통해 나라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기원전 32년(동명성왕 6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복속시켰고, 기원전 28년(동명성왕 10년)에는 북옥저(北沃沮)를 정벌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떠나온 부여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기원전 24년(동명성왕 14년) 왕의 어머니인 유화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나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 주고 신묘(神廟)도 세워 주었다. 주몽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같은 해 겨울 사신을 통해 토산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기원전 19년(동명성왕 19)에는 부여에 두고 왔던 부인과 아들 유리(類利)[유리왕(琉璃王)]가 고구려로 넘어 왔다. 유리를 태자로 삼은 주몽은 같은 해 9월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용산(龍山)에 묻히고 동명성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광개토왕비와 「동명왕편」에는 왕의 죽음이 훨씬 신비롭게 묘사된다. 광개토왕비에서는 왕이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며, 「동명왕편」에서는 왕이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자 태자가 왕이 쓰던 옥채찍을 대신 용산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천제의 자손인 주몽은 탄생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남달랐던 셈이다.

  이상 살펴본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행적은 후대의 윤색이 많이 가해져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실체 또한 불분명하다. 하지만 동명성왕에 대한 인식은 고구려 왕실에 권위를 부여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고, 고구려 정치의 작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동명성왕은 고구려인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자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인간 주몽의 모습은 신격화된 영웅의 모습에 가려지게 되었지만, 한 국가의 시조로서 그는 그러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